김수영 시인 때문에
#김수영 시인의 [거대한 뿌리] 시 중에 노란색 글자는 마우스 긁어 보시면 됩니다. 같은 색깔로 쓰기엔 너무...그리고 너무 길기 때문에 시간 여유 가지시고 보십시오. 너무 길게 써서 죄송요.
저는 1977년 8월 31일에 경북대 사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하여 9월 22일에 문경시 가은읍 가은중학교에 발령받았습니다. 스물일곱살 청년이었지요. 3학년 마치고 군대 갔는데 군대 다녀오는 기간이 이상하게 맞물려 4학년을 2학기부터 하게 되어 추가졸업을 하게 된 겁니다.
지금의 옆지기는 대학 동기이지만 군대를 안 갔기 때문에 훨씬 먼저 졸업하여 75년 3월 1일 모교인 문경여고에 근무중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문경여고가 있는 점촌에 열차를 내려 마눌에게 도착 전화를 하고 문경교육청에 들어갔습니다. 처음 문경에 발령받아 오는 사람들은 지금의 문경읍(새재가 있는 곳)까지 열차를 타고 가서 교육청이 없기 때문에 다시 점촌으로 되돌아오는 낭패를 당하기 일쑤이지만, 저는 마눌(당시는 결혼 전이었습니다.) 덕분에 그런 낭패를 당하지 않았죠. ㅋㅋ 교육청에서는 가장 먼저 [부임포기 포기각서]부터 쓰라고 합디다. 문경은 당시만 해도 너무도 오지라서 학교에 도착해보고는 그냥 달아나버리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죠. 그래서 달아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셈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포기하지 않고 살아 왔습니다.
서론이 길었군요. 9월 하순에 학교를 가보니 5월에 그만 두고 간 선생님의 후임이었습니다. 중1을 담당했는데, 1학기 교과서도 덜 배웠더군요. 8교시 수업을 더 넣어서 1학기 교과서 진도도 다 나갔습니다. 너무 고달프고 힘이 들어 달아날까 생각하다가 참으며 근무했습니다. 당시 동료 선생님들과 아주 재미나게 저녁시간을 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막걸리 집에 가서 젖가락을 두드리며 유행가를 밤 12시까지(당시 통금이 있어서) 불러제끼는 게 참 좋더라구요. 당시 전 술도 쎘었습니다.
시월 초 어느 일요일 자전거 뒤에 김수영 시인의 시집 [거대한 뿌리]를 싣고 봉암사 절로 혼자 갔습니다. 절 앞 냇가 바위에 누워 시집을 읽고 있었죠. 그러다가 시집을 자전거 짐실개에 얹어두고 꿀밤을 주워다가 돌멩이로 으깨어 개울물에다 떠내려 보냈습니다. 그러니까 그 물 속의 피라미와 송사리들이 꿀밤 부순 것을 잘도 받아 먹더라구요. 재미가 나서 자꾸 같은 짓을 반복했습니다. 그때 인기척도 없이 다가온 스님 한 분이 [지금 뭐하는 거예요?] 하고 물어오셨습니다.
손을 보니 오른손 새끼손가락과 약지 손가락이 없었습니다. 맨 끝에 이 사연이 나옵니다.
이런 삼지(三指) 스님을 저처럼 어린 나이에 만난다는 것은 보통 행운이 아닙니다. 이럴 때 근기(根基?根氣?;공부를 할 수 있는 착한 기틀)가 좀 있다면 뭔가 한 소식 깨달을 수 있기도 한 겁니다.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는 것이죠. 이런 때는 뭔가 건방짐을 내비쳐야 합니다. 그냥 순하게 인사를 하면, [잘 놀다 가시오.]하고 가버리실 수도 있죠. 찬스는 기회라고 옛말에도 있지 않습니까?^^ 또 기회의 신 ‘카이로스’는 뒷머리가 대머리이기 때문에 지나가버린 뒤에는 잡을 수가 없답니다. 다가오는 카이로스만 붙잡을 수가 있다는 겁니다.
[제가 가은중학교 국어선생인데, 내생에도 선생이 되고파서 이 물고기들이 내생에 사람으로 태어나면 저에게 배우러 오라고 밥을 주고 있는 중입니다.]
요렇게 건방을 떨었죠. 스님께서는 금방 표정이 ‘요놈 봐라!?’란 표정으로 바뀌셨습니다. 그리고 역시 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이렇게 물어 오시는 겁니다.
[물고기가 사람이 되려면 몇 억겁을 거쳐야 하는지 알아요?]
[좋은 인연 연거푸 만나면 얼마 걸리지 않을 수도 있잖습니까? 다른 냇물 다 놔두고 지금 절 앞 이 개울에서 헤엄치고 있는 걸 보면 가능성이 상당히 높지 않겠습니까?]
[허허허 젊은 선생님이 제법일세!]
[자전거 위에 실린 저 책은 뭐예요?]
[네, 김수영 시인의 시집 「거대한 뿌리」입니다.]
[유명한 시인인가요?] 전 이 순간 비틀어보고 싶었습니다.
[아뇨, 유명한이 아니고 김수영입니다.] ‘유명한’이란 말을 사람 이름으로 들은 것처럼...
[그럼 안 유명한이로군요.] 스님께서도 농을 걸어오십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셨습니까?] 제가 못 알아들은 겁니다.
[내가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으니 유명하지 않은 사람이죠.] 역시 스님은 친절하십니다.
[그냥 김수영이라고만 하면 모든 국민이 다 아는데요? 유명하단 말을 붙일 필요가 없는...]
[그런가요? 내가 과문(寡聞)한 탓이로구먼...] 이때다 하는 생각이 들어 주룩 말했습니다.
[네 그렇다고 생각됩니다. 김소월 시집 빼구요, 작년 한 해, 1만부 이상 팔린 시집은 이 시집이 유일합니다. 김춘수 시인의 「처용」이란 시집이 2위를 했는데 8천부 팔렸구요. 이성부 시인의 「우리들의 양식」이란 시집이 7천부 나갔습니다.]
[선생님도 순위 매기기를 좋아하시네!?] 이 순간 머쓱해졌습니다. 섬찟해지기도 했구요. 바로 사과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많이 팔린다고 좋은 시집은 아닙니다만, 세속에서는 그래야 더 잘 알아듣습니다. 그런 일에 익숙해져서 그만 평소 버릇이 나왔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그런데 많이 팔리면 더 좋은 거요?] 헐! 이 무슨 해괴(駭怪)한 말씀을 다 하시나? 아니면 정말 모르시나? 이런 생각이 막 지나갔습니다.
[시집이 2천부 팔리면 시인의 옷이 달라지구요, 2만부 팔리면 냉장고가 커지구요, 20만부 팔리면 집이 바뀐답니다.]
[그러면 쓸 데 없는 것들만 달라지는구료!] 헐~! 할말업뜸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다 중요한 것들 아닙니까?] 스님의 뜻을 알았지만 대들었습니다.
[결국은 다 버릴 것들만 달라진다 하니, 시를 괜히 쓰는구먼...]
[아뇨, 돈만 번다는 게 아니라 시인이 유명해지죠.]
[유명? 이름이 난다고? 이름 얻어 뭐할 건데? 저승에 가면 이름이 없어지는 거요. 어차피 버려야 한다구. 또 내생에는 다른 이름으로 살아가야 하는 걸!]
[그렇지만 유명해지는 건 좋은 겁니다. 사회적으로 영향력도 더 커지구요, 세상을 좀 더 아름답게 만들기도 하구요,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기도 하구요.]
[아하! 기쁘고 즐거운 사람을 더 기쁘고 더 즐겁게, 슬프거나 아픈 사람은 덜 슬프고 덜 아프게 해준다는 말이로구먼.] 이제사 뭘 좀 알아들으시는 듯합니다.
[예, 예, 맞는 말씀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었던 게 바로 그런......]
[그러면 무당이네, 무당! 무당들이 그렇게 하잖우?] 헐! 할말업뜸입니다.
[그건 좀 다르죠. 우리 사람들을 훨씬 더 격조 있게 만들어주는 분들이죠.]
[그래, 우리나라에 시인이 몇 명이나 있어요?]
[지금 살아계시는 분만 하더라도 천 명쯤 될 듯합니다. 세계에서 인구 비율상 최고라고 하죠. 루이제 린저라는 독일 소설가가 재작년에 우리나라에 왔었는데 김포공항에 내려 마중 나온 시인 수백 명, 소설가 수십 명과 인사를 나눈 후, ‘이 작은 나라에 어떻게 시인이 이렇게 많소?’ 했답니다. 그러나 버스를 타고 전국을 돌아다녀 보고난 뒤 다시 한 말이 ‘산천이 이렇게 아름다우니 시인이 많을 수밖에 없겠구나.’ 했답니다.]
[그럼 우리나라는 이제 아프고 슬픈 사람 다 없어졌겠네!] 헐~! 다시 말문이 막힙니다.
[그런 것과는 다른 거죠!] 상당히 격앙된 목소리로 내뱉았습니다.
[그러나 난 그런 시인들 이름을 처음 들어보는 걸!]
[그러면 스님께서는 어떤 시인을 아시는지요?]
[아 그야 뭐, 학교 다닐 때 들었던 김소월, 이상화, 이육사, ....]
[네, 그러시군요. 다 돌아가신 분들이죠.] 좀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그럼 자전거 위에 있는 저 시집 중에서 가장 유명한 시가 뭐예요?]
[시집 제목이기도 한 ‘거대한 뿌리’라는 시입니다.]
[그래요? 그거 한 번 읽어 주슈!]
[읽을 수가 없습니다. 욕설이 많이 들어가 있거든요. 이런 말을 스님 앞에서 제가 어떻게 입에 담을 수가 있겠습니까?]
[시에 나오는 말인데 그게 뭐 어떻소? 아무 상관없어요.]
[안됩니다. 차마 입에 담을 수가 없습니다. 도저히...]
[괜찮아요. 우리 둘밖에 없지 않소?]
[그냥 직접 읽어 보시지요.]
[아니, 난 선상님의 목소리로 듣고 싶소. 글을 읽을 줄 몰라요.]
[거짓말 마세요. 문맹이란 말씀입니까? 조금 전 학교에 다닐 때 시인들 이름 알게 되었다고 하셨잖아요.]
[허허허, 젊은 선생님이 예리하시구먼... 그러나 난 꼭 선상님 목소리로 듣고 싶소.]
전 여러 번 사양했지만 막무가내 읽어 달라고 하셨습니다. 할 수 없이 ‘거대한 뿌리’ 페이지를 찾아 크게 낭독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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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뿌리
김수영
나는 아직도 앉는 법을 모른다
어쩌다 셋이서 술을 마신다 둘은 한 발을 무릎 위에 얹고
도사리지 않는다 나는 어느새 남쪽식으로
도사리고 앉았다 그럴 때는 이 둘은 반드시
이북 친구들이기 때문에 나는 나의 앉음새를 고친다
8·15 후에 김병욱이란 시인은 두 발을 뒤로 꼬고
언제나 일본 여자처럼 앉아서 변론을 일삼았지만
그는 일본 대학에 다니면서 4년 동안을 제철회사에서
노동을 한 강자(强者)다
나는 이자벨 버드 비숍* 여사와 연애하고 있다 그녀는
1893년에 조선을 처음 방문한 영국 왕립지학협회 회원이다
그녀는 인경전의 종소리가 울리면 장안의
남자들이 모조리 사라지고 갑자기 부녀자의 세계로
화하는 극적인 서울을 보았다 이 아름다운 시간에는
남자로서 거리를 무단통행할 수 있는 것은 교군꾼,
내시, 외국인의 종놈, 관리들뿐이었다 그리고
심야에는 여자는 사라지고 남자가 다시 오입을 하러
활보하고 나선다고 이런 기이한 관습을 가진 나라를
세계 다른 곳에서는 본 일이 없다고
천하를 호령한 민비는 한번도 장안 외출을 하지 못했다고 ……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 나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시구문의 진창을 연상하고 인환(寅煥)네
처갓집 옆의 지금은 매립한 개울에서 아낙네들이
양잿물 솥에 불을 지피며 빨래하던 시절을 생각하고
이 우울한 시대를 패러다이스처럼 생각한다
버드 비숍 여사를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비숍 여사와 연애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진보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네에미 씹이다 통일도 중립도 개좆이다
은밀도 심오도 학구도 체면도 인습도 치안국
으로 가라 동양척식회사, 일본영사관, 대한민국 관리,
아이스크림은 미국놈 좆대강이나 빨아라 그러나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 제3인도교의 물속에 박은 철근 기둥도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괴기영화의 맘모스를 연상시키는
까치도 까마귀도 응접을 못하는 시꺼먼 가지를 가진
나도 감히 상상을 못하는 거대한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
* 이자벨 버드 비숍 여사: 영국의 여행가, 작가, 지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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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듣고 나시더니 스님께서는
[별 욕도 없구먼...] 이러셨습니다.
[듣기에 민망하지 않으셨습니까?]
[괜찮은 걸요. 우리 모두 다 가지고 있는 것 아니겠소? 우리의 고향이기도 하고...]
[헐!] 제가 머쓱해졌습니다. 아참 그 당시는 ‘헐’이란 말이 생기기 전이었습니다.^^
[스님! 저는 스님 요청 들어드렸는데, 스님께서는 제 요청 두 개 들어주실래요?]
[어째 말하는 걸 보니 되게 어려운 부탁 하려는 것 같은데? 그럼 난 싫어요.]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좀 곤혹스러운 것이긴 하지만...]
[들어줄 것인지 말 것인지는 들어보고 결정할 터이니, 말이나 해 보시구랴!]
[그러면 제가 말 하나마나 아니겠습니까? 안 들어준다고 하실 게 뻔하잖아요?]
[허! 그것 참, 일단 말을 해 봐요. 내 힘으로 되는 일이면 왜 안 들어 주겠소?]
[그러면 들어 주실 거라 믿고 말씀 올려봅니다.]
[어서 말해 보시라니까?]
[제가 평생 교사 생활을 해야 합니까? 아니면 중간에 직업을 바꾸게 됩니까?]
[허허허, 이 양반이 나를 정말 무당으로 아는구먼.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소?]
[도술이 높아 보이니까 여쭙는 것이지요. 가르쳐 주세요.]
[총각이요? 여친은 있고?] 이때는 아직 여친이란 말이 생기기 전입니다. 애인이라 하셨는지 휘앙세라 하셨는지 약혼자라 하셨는지 생각이 나지 않아 이렇게 썼습니다.
[예! 있긴 있습니다만 확실하게 결혼 약속 하진 않았구요, 아직 미혼입니다.]
[내외간에 평생 선생으로 살아갈 테니 다른 생각 하지 마시오.] 헉~!
이 말 때문에 전 교사 생활 3년 한 뒤, 그렇게 하기 싫어졌었는데 전직 못했습니다.
5년에서 6년으로 넘어갈 때도 그렇게 하기 싫었는데, 이 말의 마법을 못 벗어났습니다.
꽃님들께서는 절대로 장래에 대해 누구에게도 물어보지 마십시오. 마법에 걸립니다.
그렇다고 교직생활 해온 걸 후회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래 또 한 가지는 뭐요?]
[스님께서는 왜 손가락 두 개가 없습니까? 그 까닭을 소상히 설명해 주십시오.]
[그것 참, 곤란한 질문이네. 내가 알고 있는 바니 설명을 안 해 줄 수도 없고...]
[그러시죠? 스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죠?]
[그렇구랴. 으음... 일반인에게 말해서는 안 되는 일인데...]
한참을 망설인 끝에 스님은 설명해 주셨습니다. 경악을 금치 못할 이야기였습니다. 저도 한 때는 스님이 될까 많이 고민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는 스님 되지 않기를 잘했다 싶었습니다. 전 스님들께서 그냥 염불이나 하며 놀면 된다고 알았거든요. 스님들께 죄송합니다.
[내가 택한 공부 방법은 손가락을 태우는 거였어요. 화두(話頭) 풀이에 몰입할 때 초를 몇 미리 정도 잘라서 손가락 끝에 올리고 불 붙여 참선에 들지요. 그러면 그 초가 1~2분간 타들어가다가 손가락 끝을 조금 태우게 된답니다. 물론 따갑고 아프고 쓰립니다. 몇 초 못 버티고 참선에서 깨어나게 되지요. 손가락 끝은 화상을 입어 짓무르고 파열되고. 매일 밤새도록 가부좌하여 이렇게 삼매에 들면 조금씩 조금씩 손가락이 타들어갑니다.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으면서 용맹정진 하는 거예요. 손가락 하나 다 태우는데 10년쯤 걸립니다. 처음에는 잘 참지 못하기 때문에 새끼손가락 하나 다 태우는데 10년 조금 더 걸렸어요. 그 다음부터는 조금 더 쉬워지니까 약지 태우는데 10년 걸리고. 나는 너무 늦게 시작하여 이 나이가 되도록 두 개밖에 못 태웠답니다. 이제 속이 시원하슈?]
이 경악할 이야기에 더 이야기 나누고 싶은 마음이 하얗게 지워져 버려 그냥 인사하고 내려왔습니다. 무시무시해져서 더 버틸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깨달으신 바가 무엇입니까? 또 중지(中指)도 곧 시작하실 건가요?]가 제가 더 묻고 싶었던 말입니다. 지금도 궁금합니다. 그 스님 손가락 태우기를 더 계속하셨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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