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수필

[스크랩] 2월 11일, 원심 스님을 찾아뵙고 왔습니다.

더바 2017. 12. 5. 22:18



봄 바람이 따뜻해지면 원심스님을 한번 뵈러 가려고 작년 가을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군대 생활을 함께 했기에 득도한 스님을 찾아간다기보다는 전우를 찾아간다는 느낌이었다.

스님은 군 입대 전 해인사에 사미승으로 들어가 성철스님의 가르침을 3년 간 받은 분이다.

절에서 지내는 동안 큰스님의 "불허한다!"는 말씀으로 수계(受戒;행동 규범을 불자답게 하겠다는 약속의 의미로 오계, 십계, 구족계 등 정해진 수계의식을 받아야하는 불가에 귀의하는 첫 관문이다. 종류에 따라 삼귀의계, 오계...수계는 사찰에서 수계식을 통해 받게 되는데 명종, 개회, 거향찬, 청성, 청사, 개도, 참회, 연비, 삼귀의, 선계상, 발원, 회향의 순으로 진행된다 )하지 못하고 3년을 지낸 것이다.

아마 큰스님께서 원심이 속세의 절을 삭인 뒤 수계(授戒)하시려고 미루신 듯하다.(이건 내 생각)

나와 같은 나이이고 같은 학년이니 고등 졸업 후 내가 대학 3학년 다닐 동안 중질 3년을 하신 분.

경남 함안의 아주 부농(논만 해도 100마지기였다 한다) 맏아들.

나중에 제대 후 그 많은 재산을 계모가 낳은 동생에게 다 주고 몸만 가지고 출가하였다.


수계하지 않고 입대하면 승병으로 입대가 안되므로 일반병으로 입대하여

부산 '1203건설공병단'까지 팔려온 것이다. 무슨 인연인지 나도 이 부대로 팔려 갔었다.

같은 내무반을 쓰고, 213대대 본부중대 사무실에 함께 근무하였다.

나보다는 서너달여 고참이므로 아주 친하게 지냈다.

내가 서예를 좀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휴가 다녀오면서 문방사우(文房四友)를 사다 주신 분이다.


성품이 온화하고 찬찬해서 참 잘 지냈다. 고참들도 그의 인품에 감명 받아 존중하는 상태.

그러나 같은 졸병신세였으므로 내무반에서 기합(氣合)을 받을 때는 함께 받았다.

관물대에 발을 올리고 깍지를 낀 채 엎드려뻗쳐를 하면 정말 고통스럽다.

5분만 하고 일어나도 손가락이 퉁퉁부어 꽉 끼므로 두 손을 분리하는데 아주 고통스럽기 그지없다.

하루는 기합받을 때 얼굴을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이 분의 얼굴은 기합을 받지 않고 있는 평온한 얼굴이었다.

나는 거의 귀신 얼굴처럼 마구 일그러졌을 터인데 말이다.


잠들기 전에 물어 보았다. "어찌 그리 얼굴이 평온했어요?"라고,

대답이 심쿵하였다. "큰스님(성철) 모시고 큰절(해인사)과 백련암 왔다갔다 하는 생각 해요."

마음이 거기 없으니 고통 또한 없다는 이야기다. 물론 땀은 나처럼 줄줄 흘리고 있었다.


수십여 년 전, 스님은 점촌을 지나가면서 나에게 연락을 해왔다. 81~2년 봄방학이던 걸로 기억한다.

당시는 카페가 없었으므로 점촌에서 가장 성업이었던 다방에서 만났다.

내가 자주 스님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마눌도 보고싶다며 함께 나갔다.

제대후 십여 년 만의 만남이라 반갑기는 한데, 무슨 선물을 해야 할 지 몰라서

마눌이 당시로는 에법 큰돈, 삼십만 원을 봉투에 넣어 드렸다. 옷이나 한 벌 해입으시라고......

다음은 스님의 말씀이다.


"허허허 고맙습니다. 허나 제가 새옷이 두 벌이나 있어요. 세 벌 있었는데, 두 벌만 필요하므로 한 벌은 다른 스님 드렸어요. 모두들 헌 옷을 좋아하시는지라... 빨래해서 말릴 동안 갈아입을 수 있는 옷 한 벌만 더 있으면 되지요. 직접 농사 짓지 않고 살아가니 중질 일 년만 하면 제것이 없답니다. 뼈와 살도 다 얻어먹고 생긴 것이니까요. 그래서 받아 갈 수가 없습니다. 신랑이나 한 벌 해 드리세요."


커피 한 잔 마시고 그리고 그는 표표히 떠나갔다. 전국 사찰을 좀 돌아보는 중이라면서...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김천 증산면 수도리에 있는 수도암에서 정진하신다는 말도 있었고,

해인사 대중 속에 섞여 사신다는 말도 있었다. 그외 여러 절에도 계신다고.....

모중학교 근무할 때(80~83년도) 불심 깊으신 교감샘을 모시고 스님을 만나보러 김천 청암사에 갔었으나,

나는 당시 청암사 바로 옆에 수도암이 있는 걸로 알고 갔었던지라 만나볼 수가 없었다.(서로 대단히 멀어요.)


그러다가 경남 거창군 웅양면 해발 700m 산자락에 토굴을 짓고 정진하신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십 여 년 전이다. 마눌과 다시 거길 찾아갔다. 

우리가 간다고 보살님께 미리 전화를 해 두었던지라, 점심상을 차리고 우릴 만나주셨다.

토굴에 계시는 스님을 밥해주는 보살님이 모시고 내려와 공양간에서 만났다.

얼마나 초췌한지 누더기를 입었고, 얼굴에는 마른버짐이 피어 가루가 떨어질 듯하였다.

당장 데라고 웅양면소재지에 가서 불고기라도 잔뜩 구워먹이고 싶었다.


어떻게 지내세요? 라며 물었더니, 그냥 잘 지낸다고 하셨다.

세 시에 일어나 소쇄하고, 아침 예불 올리고,

다섯 시에 아침 공양 하고, 불전에 참배 독경하고

열두 시에 점심 공양 하고 , 토굴에서 정진하고,

오후 다섯 시에 저녁 공양 하고 , 법당에서 예불한 뒤,

밤 아홉 시에 잠자리에 든다.고 요약해 주셨다.


우리 부부가 얻어먹었던 점심 공양이라는 게 참 가관이었다.

나물(깻잎 장아찌, 고들빼기 지, 콩나물 무침)과 잡곡밥.

앞 접시를 주면서 세 가지 반찬을 덜어다 먹으라고......

속으로 '이러니 마른 버짐이 핀 채로 살지~!'하는 속말이 솟아 올랐으나 차마 뱉지는 못하였다.

식구는 청소와 농사를 담당하는 처사 한 분과, 식사를 맡은 보살 한 분과 스님, 이렇게 세 명이었다.

당시 처사님은 마눌의 동기생 오빠였다.

이런 인연도 참 희안하였다.


당시, 스님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보살님의 한탄이 쏟아졌다.

"절 살림이 말씀이 아니라서 공양이 너무 허접해 죄송합니다. '초파일날 우리도 등을 좀 겁시다.' 하였다가 혼만 났습니다. '등쳐먹을라고 등 단다 하더니, 신자들 등쳐 먹을 일 있나? 등을 왜 걸어!'이러시니 매년 초파일에 등도 하나 못 걸고 지내지요. 그래도 굶어죽지 말라고 그러는지 가까이 사는 신도들이 스님을 못 만나면서도 쌀과 간장은 안 떨어지게 해 줍니다."

스님의 이런 퉁명스런 말투는 틀림없이 성철스님에게서 배운 것이리라....

그 스승에 그 제자 어디 가리오?

불전에 봉투를 하나 넣고 돌아왔었다. 반찬 좀 사다 잡수시라고 직접 드리면 안 받을 것이 뻔하므로...


그리고 83년부터 성당을 다니다 보니 자연 절과는 인연이 멀어져 거의 잊고 살았다.

퇴직 후 바로 만나러 가고자 하였으나 속세의 일이란 게 '하는 일 없이 번잡'하여 뒤로 미루기만 하였다.

그러다가 새해 들어 설도 쇠고 하였으니 세배도 드릴 겸 한번 가보자고 벼르다가

모처럼 별 일 없이 조용하기에 토요일 집을 나섰다.

녹차 한통과 사과 한 상자를 싣고 출발하였다.

길이 좋아져 1시간 반 만에 토굴에 도착하였다.

11시에 나섰으니 김천 지례면을 지날 때쯤 11시 59분이었다.

운전 중 전화를 하는 범법행위를 하였다. 12시 정각에 공양을 드시는 성미란 걸 알고 있기에...

중간에 먼저 점심 공양하시라고 했더니, 천천히 오라고 하시면서 기다리겠다고...


절은 조금 번창하여 종무소도 있었다. 거기로 들어가니 마당에 서 계신다.

반가이 합장하고 사과를 내려 현관에 두고 들어가니

스님이 상자를 들고 불전에 올려 놓으신다.

불전에 삼배하고 스님과 세배하고 공양간으로 자리를 옮겨 앉으니

그 옛날 그 보살님이 삭발하고 또 승복을 하고 식탁을 차리고 계셨다.

인사하니 옛날에 있던 그 보살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하신다.

음식을 차리는 동안 원심 스님이 설명을 하셨다.

보살로 계시다가 한 소식 얻어 출가하시고

지금은 상주 시내에 절을 하나 일으키고자 거기 사시는데,

모처럼 오신 거란다.


그럼 스님 공양은 누가 해결해요? 물었더니, 혼자 해결하신다고...

처사님도 떠나시고, 혼자 농사도 짓는다고....

손톱이 이상하다 싶어 손을 잡고 만져 보니 일을 너무 많이 하셔서 손톱이 거의 반은 물러진 상태.

울컥하였으나 억지로 참으며, 사람 좀 들여 하시라고 권했다. 돌아온 대답.

"몇 푼어치 안 되는 농사 짓는다고 사람 들이면 본전 어디서 찾냐?"고.......

식후 보이차도 우려 주시고, 커피 좋아하는 내 식미를 기억하셔서 따로 커피도 내려 주셨다.

평소 안 드시니, 내가 온다고 미리 준비한 것이리라...


그리고 나와 내자가 무슨 고민거리가 있어서 온 것이라 짐작하셨는지 자꾸 물어 보셨다.

뭘 하냐, 어떻게 사냐, 자식들은 어떻냐, 퇴직후 삶에 대한 마음가짐은 어떠냐..........

난 이렇게 물으시기에 아직 도가 터지진 않으셨나 보다 하며 안심하고 대답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곧 일어설 기미를 보이자, 느닷없이 정말 후려치는 느낌으로........

"바라기만 하고 원하기만 하고 간절히 노력하지 않으니 반반이로다!"하셨다.

나는 묻지 않았는데, 답을 해주신 것이다.

"반반이라뇨?"

"이루지도 못하고 포기도 못한다는 말이에요."

"뭐를요?" 하고 되물었다.

"지금 가장 하고싶은 일 말입니다." 하셨다. 아니 이게 뭥미?

"별로 하고 싶은 일 없는데요?" 했더니,

"얼굴에 씌어져 있는데 뭔 시치미를?" 하셨다.

"정말 없어요." 했더니,

"이삼년 사이에 가족이나 친한 친구들에게 말하고 다닌 것 말입니다." 하셨다.

곰곰 생각해 보았다. 마눌에게 더러 말하고 우리 친구들에게 간혹 말한 것이 있었다.

소설을 써보겠다고 마음 먹고 있던 일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리 간절하게 원을 세운 것은 아니었다.


"소설을 써보겠다고 마음 먹고 있기는 해요." 했더니,

"있기는 있구먼." 하셨다. 그리고,

"안 쓰면 죽을 것 같다는 그런 느낌이 지금 없는 거죠?" 하셨다.

"전 평생 그런 느낌 갖고 살아 본 적이 없는걸요!" 했더니,

"그러니 성취가 안 되지!" 하셨다.


그런데 이때 지난 주 1박2일로 테니스 친다고 전국에서 모여온 동기 친구가 한 말이 떠올랐다.

"더바, 안 해 본 일 없고, 또한 끝까지 한 일도 없잖아~!"

이때 다른 친구 5명과 내가 박장대소하였다.


"평생 정진이란 걸 해본 적 없지요?" 하셨다.

"당연하죠, 제가 정진할 만한 일을 찾을 수가 없었으니까요." 라고 답했다.

"정진 안 하면 결과가 없어요." 하셨다.

"결과가 있으면 어떻게 되는데요?" 물었다.

"한 단계 올라가쥐~!"

"한 단계 올라간다고 극락 갑니까?"

"그런 계산법이 아니고~! 계단으로 말하자면 한 계단 더 올라가서 보게 된다는 거죠."

"밑에서 쳐다봐도 윗 계단 보이잖아요."

"그러니 동경만 하다가 중둥무이(중도포기)를 하고 마는 거죠."


좀 느낌이 와서 다시 물었다.

"한 계단 더 올라가면 뭐가 보이는데요?" 당돌하게 말했다.

"우리가 삼차원에 산다면서 앞에 앉은 사람의 뒷면은 못 보잖아요?"

"왜요? 뒤로 돌아가서 보면 다 볼 수 있잖아요."

"그건 뒤로 돌아가는 시간을 들여야 알게 되는 거죠."

"그게 뭔 말인데요?"

"사차원으로 올라가면 동시에 4면이 다 보이고 심지어 속도 보인다는 말입니다."

"그게 그거 아닙니까?"

"아니 이렇게 못 알아듣다니....... 시간을 초월하게 된다는 말씀이에요."

"그게 또 뭐가 다릅니?"

"시간을 초월하면 실체를 보게 된다는 뜻이고, 더 나아가서 전생과 후생도 보게 된다는 뜻이에요."

"이미 지나간 일인데, 전생 알아서 뭣합니?"

"지금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를 알게 되고, 내생에 어떻게 될 지 알게 되는거죠."

"그러면 좋은 건가요?"

"모든 일의 원인과 결과를 알게 되므로 현재 나의 생활이 극도로 편안해지겠죠."

"편안하려고 그런단 말입니?"

"아니, 간단하게 손가락만 까딱하고도 나의 미래를 바꿀 수 있게 된다는 거에요. 나비효과도 안 읽어 보았나벼."

"그거야 읽어 봤죠. 바꾸면 내생에 대통령이 된답니?"

"아이고, 말도 잘 하네! 지금 누구처럼 순시리 흙탕물에 함께 뒹굴지 않게 되겠죠."

"갑자기 대통령 이바구는 머하러 하십니?"

"자기가 먼저 해놓구는... 알아듣게 해주려고 하면 꼭 이러더라구."

"그면 박그네가 전생에 손가락만 잘 까딱 했으면 훨씬 더 훌륭한 대통령 된다는 말입니?"

"이제 좀 알아듣네! 눈만 한번 깜박했어도 이리 되진 않았겠지."

"저도 그리 편하게 바뀐다면 열 번 백 번이라도 하죠."

"지금 안 하고 있으면서?"

"어떻게 까딱거려야 하는지 알아야 하죠."

"정진을 안 하니까 알 수가 없지. 정진을 하지 않으면 방향을 모르는 거죠."

"삼일기도도 못하는데, 그런 거창한 정진을 어더렇게 합니?"

"그래서 지금이나 내생에나 그저 그렇게 사는 걸 반복한다는 말이지요."

"그게 어때서요? 적당히 살고 적당히 행복하고 적당히 즐겁고 적당히 재밌고......."

"그러니 모두들 천만겁이 지나도록 꼴값 떨며 살다가 우연히 나쁜 인연 만나면 축생으로 떨어져 고생하지."

"아이고 어려버라. 축생되면 고생을 고생인지 모르고 살겠죠."

"그걸 인간의 눈으로 보게 되면 아주 측은하게 여기게 된다는 말이지. 한 계단 위에서 보니까..."

"그럼 우리보다 한 계단 위에서 보는 누군가는 우리가 불쌍해 보이겠네요."

"당연하쥐. 몇 초 뒤의 일도 모르고 사는 거 보게되면, 우짜든동 끌어올려 주려고 애를 쓰겠지."

"그럼 그냥 확 끌어올려주면 되죠."

"무슨 수로? 더바 힘으로 어떤 강아지나 송아지를 인간으로 화생(化生)시킬 수 있겠어요?"

"당연히 못하죠."

"그분들도 그렇게 못해요. 그래서 불법은 자력신앙이쥐. 남들은 해결 못해 주니까."


시계를 보니 4시가 가까웠다.

오랫만에 안부나 묻고 덕담이나 한 마디 들으려 왔는데, 이 무신 야단법석(野壇法席)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를 왜 자꾸 정진시키려고 애쓰세요? 그냥 두시지... 이만해도 괜찮은 인생인데..."

"중생을 제도하는 게 중의 의무니까 그런 거죠."

"다른 중생들이나 잘 구제해 주세요. 저야 뭐, 고소공포증 체질이니까요."

"애고, 내 공부가 부족한 탓이로다. 가르쳐 주려면 달아나려는 중생만 찾아오니..."

"그럼 전생으로 가셔서 손가락 까딱하고 오세요. 말 잘 듣는 중생만 찾아오게!"

"허허허, 큰스님이 날 보고 '헛짓 평생 하고도 성과 없이 떠나겠구나!' 하시더니..."

"하하하, 큰스님이 그걸 다 아셨군요?"

"그러니까 도인이시쥐."


잠시 만난 것 같은데, 네 시가 넘었다. 서둘러 일어섰다. 부처님께 반절(선채로 합장)하고 불전함에 봉투 하나 넣었다.

"건강 잘 챙기시고, 농사일 줄이시고, 중생들 잘 제도하시고 잘 지내세요."

"헛 중생만 찾아오고, 헛 설법만 하는 이 평생 건너야 참 중생 참 설법하는 내생이 오겠죠."

하시며, 직접 농사지으신 야콘 두 상자 실어 주신다.

손을 흔들며 차를 몰고 산을 내려왔다.

집까지 시간 반 오면서 울 내외는 별 말이 없었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이 모든 헛짓이 내생에 참짓하게 되려고 이러는가? 이런 생각을 하였다.


<참고> 스님은 어릴 때 아주 경미한 뇌출혈이 있었다고 합니다. 사지가 불편하지 않으니 가족이나 자신도 모르고 그냥 살았다고 합니다. 공부를 아무리열심히 해도 외는 게 안 되더랍니다. 며칠만 지나면 다 까먹게 되고... 머리가 나빠서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니 속세를 떠나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토굴생활을 하던 30대 후반 다시 한번 경미한 출혈이 있었는데, 이때 병원에 가서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한 십여년 간 잘 움직이지도 못하고 끙끙 앓으며 지냈다고...... 그래도 다행히 팔다리 마비까진 오지 않아 다시 공부를 계속하게 되었다고...... 집념의 화신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직도 토굴 정진을 계속하니 찾아오는 신자는 거의 없는 듯하였습니다. (특정 종교 이야기를 써서 다른 종교인들에게 죄송합니다. 저는 현재 성당에 다닙니다.)

출처 : 바람재들꽃
글쓴이 : 더바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