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발얘기

[스크랩] 이도 다완(대정호)-사진이 너무 검네요.

더바 2006. 12. 15. 08:54
키자에몬 이도다완 (井戶茶碗) | 먹물이 글씨가 될
2001.12.27



키자에몬 이도다완(喜左衛門 井戶茶碗)은 일본에서 다완으로서는 최고의 위치에 있는, 大名物로 불리우며 '천하제일의 위대한 그릇'으로 추앙받고 있는 차그릇입니다.
이도다완류는 大井戶, 靑井戶, 小井戶, 井戶脇이 남아 있는데 모두 20여점 정도입니다. 국내에는 한 점도 남아 있지 않지만 조선에서 만들어져 일본으로 건너간 것은 의심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특히 키자에몬 이도다완(대정호다완)은 보물 중에 보물, 국보로 지정되어 일본 茶道人의 사랑을 듬뿍 받는 神品으로서 무로마치 막부시대 이후 역사의 중심에서 그 흥망성쇠를 같이하며 다도계 흐름을 주도해온 유서깊은 그릇이기도 합니다.

이 大名物은 조선 초기에 제작되어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추정되며 키자에몬이란 이름은 다케다라는 성을 가진 오오사카의 상인의 이름에서 유래한다고 합니다. 17세기 초 다케다는 혼다카다요시(本多能登守)에게 헌상하였다는 기록이 명문으로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혼다 이도'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그 이후 1634년 나카무라 소에추(中村宗雪)이라는 차의 大家에게로 넘어갔고, 1751년에는 토시이에시게(土唐氏家茂)의 소유가 되었고, 1775년에는 다완수집가 마추다이라 푸마이(雲州不昧)公이 갖게 되었습니다. 이 때 푸마이 公은 당시 大名物을 구입하기 위해 금 550냥이라는 거액을 지불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푸마이 公은 죽으면서 "이것은 천하명물이니 오랫동안 소중하게 보관하라"는 유언을 붙여 아들 게탄(月潭)에게 물려줍니다. 게탄은 유곽의 말몰리꾼으로 전락하게 되지만 大名物 만은 평생 간직하다가 나중에 종기를 얻어 고생하다 죽게 됩니다. 우연찮게 '大名物을 가진 자는 종기의 禍를 얻게 된다'는 소문이 따라다니게 되는데 푸마이 公도 종기로 두 번이나 고생한 전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818년 게탄의 부인은 아들 마저 종기를 얻어 죽게 되자 교토 大獨寺 분원인 孤蓬庵에 기증을 하게 되고, 그 후 일본 '國寶'란 칭호를 받으며 오늘까지 전래되고 있습니다. 大名物은 명치유신 전까지 마추다이라 집안의 허락없이 누구도 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일곱개의 자물쇠를 따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외관을 자세히 보면
높이 9.1센티미터 , 구경 15.5센티미터, 고대경 5.5센티미터, 1센티미터 남짓한 굽, 그리고 한 쪽이 약간 찌부러진 듯한 모양이고, 겉모양은 오래된 나무껍질이 갈라터지듯 식은태(빙렬)가 있고, 몸통 아래 부분은 '눈물'이라 불이우는 유약뭉침이 적당히 흘러내려 자연스러운 맛을 한껏 더하고, 입 부위부터 몽통 중간까지 긴 금이 상하로 난, 한마디로 지지리도 못생긴 차그릇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도다완의 특징을 정리하면 이러합니다.
1. 보기에는 투박하고 무거운 듯하나, 손안에 넣으면 편안하고 새털처럼 가볍다.
2. 그릇의 빗깔은 부드러운 살구색을 띄어 오래 보아도 눈이 피로하지 않다.
3. 그릇표면에 나타난 유약의 흐름은 雲海가 깔린 듯 오묘한 경치를 보는 듯하다.
4. 그릇 몸체는 마치 대나무 마디모양으로 힘차고 빠르게 놀린 도공의 손을 보는 듯하다.
5. 굽도리부분의 유약뭉침은 梅花皮가 갈라진 듯 나뭇잎에 이슬이 맺힌 듯하다.
6.굽깍기한 모습은 선비와 무사가 一筆 一刀에 획을 긋고 자른 듯한 속도감이 있고 굽의 테두리모양은 초생달 모습의 여인눈섭 같다.
7. 그릇을 두드리면 나무를 두드린 것 같은 묵직한 목기소리가 난다.
8. 차를 담아 그릇에 입술을 닿으면 그 느낌이 부드럽고 온화하다.
9. 차를 마실수록 찻물이 천천히 스며들어 세월을 함께 한 정을 느끼게 하는 그릇이다.

본격적으로 이도다완을 감상하기에 앞서 먼저 일본의 茶道정신, 와비차의 정신을 알아야 제대로 감상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본의 다도는 센노리큐(千利休)가 완성, 대중화했다고 전해 집니다. 그것이 '와비차'인데, 본래의 의미는 '한적한 가운데 느끼는 정취, 소박하고 차분한 멋'으로 '閑居'를 뜻하지만, 다도에서는 '부족함에도 만족하며 신중히 행동하는 것'이라는 의미가 보태졌습니다.
한편 다도의 정신이란 '시부이(澁)'라 불리우기도 하는데, 이는 "차분하고 은근한 멋"을 말합니다. 나아가서 '인간은 모두가 대등하고 서로 존경하며 일체의 이해타산을 초월하여 정숙함 속에 마음을 정히 하고 자아를 회복하여 생활의 활력을 얻는다'는 和敬淸寂의 규범으로 마음가짐을 수양합니다.
다시말해 차를 마시는 단순한 움직임 속에서도 천하의 운행 이치를 부여하고, 그 의미를 새기면서 차라는 매개물을 통해 인간 내면을 풍요롭게 만든다는 것이 다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잔의 차 속에는 분위기가 있고, 器物이 있고, 차맛이 있는 것입니다.
이 세가지 중에 하나인 器物 선택에도 깊은 미학이 담기는데, 그 미학의 요체는 조화를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차그릇을 보는 눈, 또한 茶人이 지녀야할 덕목인 것입니다.

이도다완, 이 지지리도 못생긴 차그릇이 어째서 일본 다도인들의 마음을 매료시킨 것일까?
일본의 유명한 미학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키자에몬 이도다완에는 아름다움과 아름다움에 대한 감상과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과 아름다움에 대한 철학과 아름다움에 대한 생활의 縮圖가 있다. 이것이 천하의 名器, 名物의 정체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처럼 지극히 평범할 수 있을까? 어느 하나 장식이 없다. 어느 하나 꾸밈이 없다. 그 이상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凡夫가 成佛한 전형적인 사례이다."
그리고는 "일본의 국보인 차그릇을 만든 것은 조선인 이지만 그 아름다움을 발견한 것은 일본인들이다." 라고 했습니다.
묘한 뉘앙스가 있습니다. 조선인은 이도다완의 아름다움을 모른 체 무심히 만들어 버려두었지만 그것을 일본인들의 눈으로 그 위대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찬미함은 결국 일본인의 뛰어난 미감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조선인은 진정한 아름다움을 모르는 저급의 민족이라는 비하가 숨어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도다완을 조선의 '雜器'라 부르고 그것을 번역한 한국의 작자들은 '막사발'이라 부르기 시작합니다. 소위 부뚜막에서 굴러다니며 밥도 담고 국도 담고 막걸리도 담아 먹던 '막사발'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역사와 예술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개소리입니다. 조선 초기 도자기를 굽던 가마터는 대부분이 관요였으며, 그러니까 거의가 주문생산, 진상을 위한 생산이지, 누구나 쓸 수 있는 도자기를 생산하여 판매하고 사서 쓰고 하던 물건이 아닌 것입니다. 신분과 계급에 따라 집의 크기, 토지의 넓이, 노비의 숫자가 엄격하게 통제되던 신분사회에서 당시의 하이테크 제품인 도자기를 왠만한 집에서는 구경도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부뚜막에서 이것 저것을 담았다는 상상은 웃자는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그러한 오해의 근거는 19세기 이후 대량생산된 '막백자'에서 찿을 수 있는데, 이 사기그릇은 정말로 흔하게 막 쓰여졌습니다. 이 사기그릇을 '막사발'이라 부를 수는 있으나 모양이 비슷하다하여 이도다완을 '막사발'로 부르는 것은 일본놈보다 못한 놈들이나 할 짓입니다.

<조선 막사발, 천년의 비밀>의 저자 정동주는 이도다완의 유래를 불가에서 쓰인 '흙발우'였다고 추정합니다.
한편, 조선시대 초기에 차를 즐겼던 기록이 많이 있는데 왜 국내에서는 이도다완이 한 점도 발견되지 않는 것일까? 궁중에서 차행사를 했고, 茶時制度도 있었고, 승려 사이에서도 차가 성행했었고, 夜茶時라는 별난 풍습도 있었는데, 어째서 자취가 묘연할까? 중국의 차와 다완들이 들어오고 그 유명한 천목다완의 영향을 받아 비슷한 다완들을 만들었을 텐데 말입니다.
혹자는 이도다완의 형태가 奇形이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합니다. 그래서 소성시에 불량이 많이 나왔고, 그러므로 몇 개 만들어 보지도 못하고 그러다 생산을 중단하였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형의 원인은 태토의 특성이 수분을 머금은 백자점토로 물렁물렁한 흙이어서 입자가 부르럽고 불에 견디는 화도가 높아서 일반 그릇과는 많은 차이가 있게 된 것이지 절대로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도다완의 특징인 매화피나 높은 굽, 물레자국 등 어느 것 하나 의도된 제작기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릇의 안과 밖에 보이는 손자국도 흙과 도공이 만들어낸 자연스러운 표현이라는 것이고, 굽의 칼질, 표면의 거칠음, 그릇의 물고임현상 그 무엇도 흙과 도공 이외에는 어떠한 간섭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도다완의 비파색도 유약에서만 얻어지는 색상이 아니고 그릇 차체의 색감과 합해진 색상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이상에서 보듯 키자에몬 이도다완은 켤코 의도적으로 계산된 아름다움이 아니라 흙의 성질을 잘 아우른 도공의 숙련된 손맛이 이루어낸 무심의, 무기교의 자연미의 극치인 것입니다.
세계적 도예가인 버나드 리치는 "속물적 근성이 없는 자연스러움의 극치"라 했고,
안드레아드 에카르트는 "억제된 장식에 대한 기호, 색조의 품위있는 억제"라 했습니다.

이는 조선사회의 기저에 깔린 검소, 청렴, 질박이라는 성리학적 생활철학이 지배하는 사회적 문화적 분위기의 산물일 것입니다. 화려함이나 과시적인 것을 배격하고 '無味 속의 無限 廣大한 美'라고나 할까?
조금 찌그러들었어도 '그러면 어떠한가?'하고 여유있는 너그러움과 그 당당함, 자연스러움이 배여있는 예술관과 미감이 사회 전반에 걸쳐 퍼져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시말해 그것은 우리 조선의 정신인 것입니다. 우리 가슴에 내재된, 그러나 우리 자신은 느낄 수 없는 한국인의 미감이라고 자만합니다.

이제 우리의 관심, 서예로 돌아가서 생각을 해봅니다.
서예의 정신, 서예미 역시 茶道에서 추구하는 정신과 器物에 대한 美感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림에서 느끼는 화려함과 자극적인 색조를 뺀 '澁' - '차분하고 은근한 멋'이야말로 서예정신이요, 서예미가 아닐까?
종이와 붓과 먹의 성질을 잘 아우른 결구와 필획, 당시의 성정을 솔직 담백하게 담아내는 文章, 작가의 억제된 무기교의 기교로 작품을 대해야 할 것입니다.

키자에몬 이도다완을 빗던 이름모를 조선도공의 손길로 글씨를 쓸 수 있는 그 날을 기다리며...


출처 : 장작가마사발
글쓴이 : 서촌 원글보기
메모 : 이도다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