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재 전설 Series~2
제2보 관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는 빵따냄
의국이 너무나 시간을 끌며 1보 19를 놓는 바람에 시각이 이미 삼경이 되었다. 사신도 의외이다 보니 깊은 수읽기를 해야 할 필요를 느꼈는지 봉수를 선언하였다.
“오늘은 밤이 늦었으니 내일 사시(巳時)에 봅시다.”라며 종사관을 데리고 나가버린다.
오늘날에야 봉수하려면 자신이 놓을 자리를 관전자에게 적어주고 나가야 하지만, 중국 사신이야 그럴 필요가 없는 시절이었다. 아무 때고 자신이 필요하다면 봉수 선언을 제멋대로 하는 게 칼자루를 쥔 대국(大國)의 횡포요 권리이던 시절이었으니 어쩌랴! 을(乙)들은 항상 갑(甲)의 횡포에 정면대응하기보다는 참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름다운 밤은 짧고, 고통에 떠는 밤은 길고 지겹기 마련이다. 사신도 고통이겠지만, 의국도 고통스러운 밤일 것이요, 경빈도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샐 것 같았다. 그러나 이 고통이 또한 즐거움 아니고 무엇이랴? 고통이 곧 신비인 것을……!
사신이 숙소로 돌아간 뒤, 의국과 경빈은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판이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의국의 자세에 저절로 옷깃이 여며져 경빈도 숨죽이며 미동도 하지 못했다. 삼경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린 지도 한 식경이나 지났을까, 의국이 고개를 쳐들며 경빈에게 예를 표하였다.
“마마! 밤이 이미 깊사옵니다. 어서 침소에 드시오소서.”
경빈도 판을 바라보다가 의국의 굵직한 음성에 흠칫 소스라쳤다. 그러나 곧 의국의 얼굴에 약간의 미소가 번지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마땅한 수를 찾아냈다는 뜻이리라. 경빈은 이때에야 마음이 한결 풀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노선비! 힘들지 않나요? 내가 봐도 선비가 참 잘 둔 것 같은데…….”
“마마! 젊은이를 이처럼 염려해 주시니 황송하여이다. 허나 너무 심려 마시옵소서.”
“그래도 지금 놓은 수(흑19)는 좋아 보이지만, 사신이 봉수하고 들어갔으니 밤새도록 연구를 할 게 아니겠소?”
“하하하, 마마! 아무리 연구를 한다 해도 19로와 19로 안이겠지요.”
“호호호, 말인즉슨 그렇겠군요. 노선비도 어서 들어가 좀 쉬시구려. 내 처소의 궁녀들을 시켜 침소를 깨끗이 준비해 두었소.”
“마마, 황공하여이다.”
<여기서부터는 역사적인 사실을 피력한 부분이니 지겨운 분은 HY그래픽체까지 즉 제2보 그림 앞까지 건너뛰시면 되옵니다.>
경빈 박씨는 새재 전설 Series~1에서 등장했던 상주 출신 박소저이다. 원심스님을 도와 내기 바둑에서 중요한 훈수를 하여 원심스님이 이기게 하고, 원심이 깨달음을 얻자 절에서 내려와 조용히 부덕을 닦다가 흥청(흥청;채홍사 채청사가 미인을 선발하여 올린 처녀 중 300명을 골라 궁중으로 들인 일)으로 궁녀가 되어 궁으로 가게 되었는데, 당시 연산군의 이복동생이자 왕자이던 진성대군(훗날 중종)의 눈에 들어 왕 몰래 그의 여친이 된 것이다.
박소저의 친아버지는 경상도 상주 지방의 사족 출신인 박수림(朴秀林)이다. 시기가 뚜렷하지는 않으나 궁녀가 되기 전 박원종의 수양딸이 되어(미모 때문에 박원종이 장래를 내다보고 수양딸로 삼은 듯함) 연산군 때 입궁하였다가 왕으로 즉위한 연산군의 동생인 진성대군, 즉 중종의 정식 후궁이 되었다. 박종화 선생의 소설에 박수림과 박원종이 친척지간인 것으로 묘사되어 있으나 중종반정의 일등공신 박원종은 순천박씨이고, 박소저의 친아버지인 박수림은 밀양박씨이므로 친척인 것은 아니다.
말이 나온 김에 박원종에 대하여 조금 더 상세하게 알아보자. 박원종의 집안은 고려시대부터 막강한 집안이었다. 그는 판서 박중선의 아들로 부지돈녕부사 박거소(朴去疎)의 손자이다. 증조부 평양군 박석명(朴錫命)은 좌정승 박가흥의 큰아들이자 고려 공양왕의 조카사위로 대사헌을 지냈으며, 사육신 박팽년과는 8촌간이었다. 박원종의 할머니는 청송 심씨로 영의정 심온의 딸이며 세종비 소헌왕후의 동생이다. 심씨의 셋째형부 노물재의 본관은 교하로 그 아들이 세조 때의 정승 노사신이다. 심씨의 넷째 형부 부지돈녕부사 유자해의 본관은 진주로, 유자해의 손자가 박원종과 함께 중종 반정을 거사한 유순정이다.
박원종의 큰누이 승평부부인은 천하절색이어서 세조의 맏이 덕종(드라마에서 채시라의 남편)의 맏아들인 월산대군(형은 월산대군, 동생은 자산대군=성종 : 성종의 아들이 연산군이다.)에게 시집갔고, 또 다른 누이인 순천부부인은 윤여필에게 시집가 윤임과 장경왕후 등을 낳았다. 또 다른 누이는 예종(세조의 둘째아들 : 큰아들 덕종이 죽는 바람에 왕이 됨)의 차남 제안대군의 계부인(상처하고 새로 맞이한 부인)이 되는 등 박원종의 가문은 일찌감치 왕실과 인연을 겹겹으로 맺었었다.
특히 자식이 없었던 월산대군은 손아래처남인 박원종을 친동생처럼 사랑했는데 성종이 이로 인해 월산대군 사후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박원종을 동부승지로 삼게 되었다. 항간에는 성종의 아들인 연산군이 큰엄마인 월산대군 부인(승평부부인)을 하도 좋아해 큰아버지 댁을 자주 들락거리며 이상한 소문이 퍼지자 승평부부인이 자결한 것이라 소문나 있다.
박원종은 무술이 뛰어나 음서(과거시험을 보지 않고 조상의 덕으로 기용되는 경우)로 무관직에 기용되었고 1486년 선전관으로 있을 때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내승으로 승진했으며, 오랫동안 성종의 측근으로 있었다. 1492년(콜럼버스가 신대륙 발견한 해)성종의 특지로 동부승지에 발탁되고 공조와 병조의 참의를 거쳐 연산군 때 중추부지사 겸 경기도관찰사, 함경도병마절도사를 지내고 평성군에 봉해졌다. 그리고 승정원(청와대 비서실인 셈) 동부승지, 우부승지, 우승지, 좌승지 등을 지냈다. 후에 도총부 도총관까지 겸했으나 누나인 승평부부인(월산대군의 부인)이 자결한 이후로는 연산군(연산군이 큰엄마를 범했다는 말도 있음)과 척을 지게 되었고, 또 연산군을 혐오하였다. 우국충정으로만 반정을 일으킨 게 아니라 할 수도 있다.
1506년 성희안, 유순정 등과 함께 중종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진성대군을 중종으로 옹립하는데 주동적 역할을 맡아 정국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반정의 1등 공신이며 먼 친척의 딸을 수양녀로 들였는데, 이 수양녀가 입궐하여 궁녀로 있다가 경빈이 되었다. 이 경빈 박씨가 중종의 총애를 받는 후궁이 되었고, 역시 후궁으로 들어간 외조카딸 윤씨가 폐위된 단경왕후(중종의 부인이었으나 친정아버지가 반정에 불참하여, 왕비가 된 지 7일만에 폐비되었다.)를 대신하여 중종의 두 번째 계비가 되면서 조정의 실세로 올라서게 된다. 박원종은 또한 1507년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하였다.
그의 존재를 못마땅히 여기던 조광조 일파는 그를 공격하려 하였으나 일단 시간을 두고 지켜보기로 하였다. 1509년 영의정에 오르고 평성부원군에 봉해졌으나 중종을 반정으로 세웠기 때문에 중종은 박원종에게 함부로 대할 수 없었으며, 오히려 자신의 외조카딸과 수양딸이 각각 왕비와 후궁이었으므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게 된다. 박원종은 이를 믿고 중종 대의 훈구파를 결성하였다.
만년에 그의 집은 호화로워서 하루 안에 그의 집을 다 돌아볼 수 없었다 하며 수많은 첩과 토지를 보유하고 호사를 누렸다. 1510년에 병으로 44세의 나이에 사망하였다. 사후 중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경빈 박씨는 출중한 미모 때문에 막강 조정 대신 박원종의 수양딸로 들어가게 되었으나, 궁녀 시절에 이미 중종(진성대군 : 성종의 차남, 연산군의 동생)의 눈에 들어 사귀는 사이였을 것이라는 소문이 전해지고 있다.
백도 바로 건너가지 않고 22로 한번 올라선다. 의국은 곧바로 잘라내려 갔다. 경빈은 좀 의아했으나 한참 수를 헤아려보고서는 속으로 아! 하고 감탄했다. 백이 바로 건너가려고 하면 다음 그림처럼 잘려지는 것이다. 흑19 자리가 왜 중요한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경빈은 속으로 ‘그래서 이 젊은이가 흑19로 내려선 것이구나!’라며 감탄을 거듭했다. 그리고 24로 잇지 않고, 참고도 07처럼 두면 흑이 그 아래를 끊어 흑27까지 축으로 잡히니 이도 선택할 수가 없는 수였다.
한편 흑은 <제2보> 본보 23의 수로 내려서지 않고 <참고도-08>처럼 2선으로 아래를 제치면 백46까지가 예상되는데, 본보에 비해 백24자리로 폴짝 뛰는 수가 없어져 버려 불리한 것이다. 흑11의 곤궁함이여! 여기서 살려고 하는 것은 통시 안에서 장구 치는 격이 아니겠는가? 강호제현께서는 직접 놓아보시라. (46은 흑11의 옆구리에 마늘모로 붙이는 수도 있으나 곤궁하기는 마찬가지.)
본보 흑27로 백을 잡자고 덤비면 <참고도-09>처럼 백38의 축에 걸려 여하간 망하게 됨은 자명하다.
본보 백30 이 수로 한 줄 위로 뻗으면 <참고도-10>이 되는데, 백은 선수를 뽑을 수 있으므로 우하귀에 걸쳐온 흑을 두칸높은협공(L-16)으로 윽박지를 수 있긴 하다.
또한 <참고도-10도>의 흑33으로 <참고도-09-1도>처럼 벋어나가면, 백3점은 취할 수 있지만 백34로 2선을 막히게 되므로 최선이 아닐 것이다.
<참고도-11>처럼 빵따냄을 메꾸는 것은 역시 34로 2선을 막히게 되어 좋지 못하다. 또, 아래 참고도 흑35와 37처럼 끊어나가는 수는 있지만, 백40으로 차례가 돌아와서는 집 차지도 시원찮고, 더욱이 백16과 32를 잡으려고 장문을 닫는 것은 뒷집 개도 웃을 일이다. 두 점을 얻고 선수를 놓치는 격. 봉산탈춤 강령탈춤의 등신짓으로 유명한 말뚝이도 다 아는 유수부쟁선(流水不爭先)이요, 기자쟁선(碁者爭先) 아닌가?
좌하귀에 모 붙임한 흑33으로 좌변 석점을 살리겠다고 직접 2선(B-10)으로 기어나가는 것은 백이 한 칸 뛰어(C-12) 받으므로 좋다고 할 수 없다. 좌하귀에 걸친 흑에 대하여 협공이 되니 말이다. 좌우지간 바둑은 돌의 효율이 중요한 법이다. 한 수로 두 가지 기능을 자꾸 하게 하면 유리해지게 마련이다. 벌림과 협공을 겸한다든가 안정과 삭감을 겸한다든가 그런 수를 계속 놓아 간다면 반드시 이기게 될 것이다.
이러구러 점심나절이 상당히 지나 버렸다. 사신은 흑33의 모 붙임을 보더니 또 봉수를 선언하고 들어가 버렸다. 경빈은 너무 치열한 수읽기에 빠져 자신의 미모로 사신을 홀리기는커녕 자기가 두는 것보다 더 심취해 버렸으니 이를 어찌한단 말인가? 시중드는 궁녀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어온다.
“마마, 혼이 쏙 빠지신 것 같아 보이옵니다. 오전 내내 차도 한 잔 안 드시고 바둑판만 들여다보시다니 소인들이 죄를 짓는 것 같아 황송하기 이를 데 없나이다.”
“호호호, 괜찮느니라. 내 좋아서 이러고 있는 것이니 너희들을 꾸짖을 까닭이 없지 않겠느냐? 이제 봉수가 되었으니 너희 중 둘은 여기 노선비를 모시고 가서 점심 접대에 소홀함이 없도록 하여라. 나는 내실로 들어가 거기 아이들에게 차려오라 하겠으니.”
“예, 마마!”
처소로 돌아온 경빈은 점심을 하는 둥 마는 둥 변복(變服)을 하고는 육의전 건과 가게로 나갔다. 백이 흑에게 중앙으로 향한 곳에 빵때림을 허용한 것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무슨 기기묘묘한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조바심이 나서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바둑을 좀 둘 줄 안다면 누가 봐도 이건 괴상한 일이었다. 제물포 왜관에 머물다가 소문을 듣고 달려온 일본의 고수 가지와라 다께오[梶原武雄]도 ‘どうしたの(도~시다노~:웬일이니)?’라며 얼굴을 찌푸렸다. 또한 중국사신이 고수라고 소문 난 것이 거짓이 아닌가며 고개를 내 저었다. 다께오가 말하기를 ‘이러면 끝장이다. 기분이 나빠진다.’ 라고 하였다.
과연 여기 모인 고수들의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여도 좋다는 말인가? 아닐 것이다. 중앙의 빵때림은 30집이라 하지 않는가? 혹시 패로써 판세를 휘어잡으려고 이러는 것인가? 그러면 의국이 휘말려 들어가 일거에 판세가 기우는 것이 아닌가? 등등 별별 걱정이 경빈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바둑이란 참 묘한 것이다. 분명 좋은 분위기인데도 이렇게 걱정이 앞서다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 아기다리고기다리, 제3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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