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소설 [어당팔] 제8장
8. 운명적 재회
오늘은 금요일, 오늘만 근무하면 공무원 신분상 내일은 노는 날이다.
그러나 우리 시 관내 보훈대상자 노인 한 분이 별세하여 업무 처리가 남았다.
노인은 별 의사를 표하지 않고 타계하셨는데, 가족들이 국립묘지 안장을 원한다.
내일이 장례일이라서 대전 현충원을 유가족들과 함께 가야 한다.
내가 맡은 업무 중 참 고귀한 일이고, 국가적으로도 의의 있는 일이건만,
내일이 토요 휴무일이다 보니 약간 짜증이 난다.
그러나 이런 일로 인하여 나의 직업이 보전되게 되는 것이니,
열심히 열과 성을 다하여 일을 추진하여야 한다.
점심시간 후에 병원 장례식장을 가서 유가족과 상담을 했다.
6·25때 총알이 팔을 뚫고 지나간 바람에 유공자로 지명된 분이었다.
향년이 85세인 할아버지시니 호상이어서 유가족들도 수월했고,
현재 다 형편이 괜찮은 후손들이어서 인심도 좋았다.
내가 안내하는 대로 대체로 수긍해 주셨고, 참 호의적이었다.
퇴근 시간이 되어 내일 대전으로 갈 준비가 끝났다고 보고하니
계장님께선 퇴근하라고 채근하신다.
일찍일찍 퇴근하여 여자도 좀 만나고 사귀고 하라며,
자기처럼 늦장가 가면 여러 가지로 손해라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런 때는 얼른 사라지는 게 낫다. 더 들어보았자 그 소리가 그 소리다.
원룸에 들어와 옷을 좀 캐주얼하게 갈아입고 저번 그 길로 나섰다.
지금 이 시간이면 어제 그 시간과 거의 같은 시간이다.
이 좁은 시에서 그녀들이 퇴근하고 걷는 길이 결코 다를 리 없다.
그녀들을 다시 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생긴다.
문을 잠그면서도 휘파람이 절로 나와서 발걸음도 가볍게 집을 나섰다.
어제 그 시간 경에 그 길을 가 보리라.
시간적으로는 여유가 있었으므로 느긋하게 걸어서 번화가 앞을 지나간다.
아이 쇼핑을 하려는 게 아니라, 그녀들의 흔적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다.
전후좌우를 살피던 중 백여 미터 뒤에서 그녀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오, 예! 이런 횡재가 어디 있단 말인가? 조상께서 돌보았음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이를 어째? 내가 앞에 섰으니, 어떻게 기회를 살린단 말인가?
마침 왼편으로 꺾어지는 골목이 나왔다. 얼른 꺾어들었다.
좌회전을 세 번 더하고 본래의 큰 길로 나오니 그녀들이 삼십여 미터 앞서 있다.
눈치 채지 않게 조심스레 뒤따라간다.
세 사람의 위치도 달라진 게 없다. 어제 그대로다.
옷차림도 어제와 별로 달라진 게 없다. 속옷이야 달라졌겠지…….
오늘은 말을 걸지 못하더라도 직업 정도는 알아내야 한다.
세 사람 다 짧은 머리칼이 아니고, 긴 머리를 어깨 근처까지 늘어뜨리고 있다.
내가 점찍은 왼편아가씨는 그래도 머리칼을 끈으로 묶고 있다.
자세히 살펴보니 직장에서도 그렇게 늘어뜨린 상태로 있었던 건 아니었다.
머리칼 끝이 약간 구부러진 것을 보니 완전 생머리는 아니었다.
끝이 좀 우아하게 구부러져 있는 것으로 보아 주머니에 담겼던 듯했다.
직업을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은행원? 아니다. 지금 이 시간에 퇴근할 수 있는 행원은 거의 없다.
역무원? 아니다. 기차역에서 나온 사람들이 아니었다.
공무원? 아니다. 공무원들의 옷차림치고는 너무 캐주얼하고 야하다.
조금 더 가까이 접근하여 그들의 대화 내용을 좀 들어볼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너무 가까이 접근하면 이상한 느낌을 주지 않을까?
아이구, 모르겠다. 눈치 채면 채는 거지 뭐.
가까이 따라 붙었다. 삼사 미터 간격. 말소리가 들렸다 안 들렸다 한다.
알게 되었다. 그녀들의 직업을.
이렇게 쉬운 것을 나는 왜 그토록 망설였던가?
대화 중에 ‘환자, 보험, 과장님’ 등등의 말이 나왔으니, 틀림없이 ‘병원종사자!’
맞다. 이 시에서 가장 큰 종합병원 간호사이거나 병원 원무과 직원들인 거다.
그래 그렇구나. 그들이라면 이 시간이 퇴근할 시간이다. 방향도 맞다.
공무원보다는 늦고, 은행원보다는 빠른 시간. 이도저도 아닌 시간.
그러나 원무과 행정직인지 병실 간호사인지 어떻게 구별한단 말인가?
회사원보다 더 엄격한 제복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사복 착용을 할 때,
보통사람들보다 훨씬 멋지고 화려한 의상을 착용한다고 희창이가 그랬다.
그렇다면 이 아가씨들은 간호사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그만큼 내 눈에 이 아가씨들이 고급스러워 보인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저 위에서도 말했지만, 오늘은 금요일. 종합병원은 내일 휴무다.
오늘을 놓치면 월요일까지 다시 기다려야 한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이렇게 좋은 날씨의 주말을 또 혼자 견딜 수는 없다.
불구덩이에 들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오늘은 부딪혀야 한다.
오늘은 끝까지 추적하리라. 어떠한 난관도 뚫고 말을 붙여 보리라.
주먹을 꼭 쥐어보며 속으로 다짐을 하고, 결심을 한다.
백여 미터도 따라가지 않았는데, 갑자기 아가씨들이 헤어진다.
오른편 두 아가씨와 나의 파랑새가 이별을 하는 모양이다.
서로 손을 흔들더니 두 사람은 가던 길을 계속 간다.
나의 파랑새만 홀로 떨어져 왼편 길로 꺾는다. 이 무슨 횡재냐?
나도 당연히 왼편 길로 따라 꺾어야 한다. 너무나 당연한 소리.
그러나 나의 두 발은 내 마음과는 별도의 자율신경 지배하에 있는 모양이다.
두 아가씨를 따라 앞으로 걸어 나가버린 것이다. 이를 어째?
뒤돌아서려고 애를 썼으나 발길이 돌려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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