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소설 [어당팔] 제13장
13. 나쁜 놈도 필요악
“네, 여기서 잠깐 이야기 나누죠. 의자가 없어서 죄송해요.”
“아닙니다. 전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호호호, 아저씨도! 고맙긴 뭐가 또 고마워요? 이렇게 경을 치시면서…….”
“아닙니다. 그 아가씨 앞을 벗어나게 해주신 것만 해도 고맙습니다.”
“남희 말이에요? 걔 그런 못된 애가 아니에요. 걔 반응이 저도 좀 이상해요.”
“전 직접 장복희씨에게 말을 붙일 수가 없어서 그랬었죠.”
“네, 저도 압니다. 그리고 참 아저씨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아, 네! 전 박하준이라고 합니다. 간호사님은 박민희님이시네요.”
“네, 박하준. 조금 독특하군요. 그러나 우리 친구들 이름처럼 촌티는 안 나네요.”
“친구분들 이름이 어때서요? 다들 예쁘시던데…….”
“아니에요. 우리 친구들이나 제 이름이 촌티 나죠.”
“그런데 절 보자고 하신 까닭이…….”
“아, 네. 내 정신 좀 봐. 엉뚱한 이야기만 하고 있었네. 죄송해요.”
“아닙니다. 아무 말씀이라도 괜찮습니다. 괘념치 마시고 하세요.”
민희의 말솜씨는 조곤조곤하다고 말할 수 있다.
목소리 톤도 높지 않고, 어조도 빠르지 않아, 소리는 작았지만 듣기는 좋았다.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그 아가씨는 장복희라는 아가씨인데,
자기들처럼 이 병원에 근무하고 있는 간호사라고 했다.
셋 모두 이젠 제법 고참이 되어 3교대에서 벗어나긴 했는데,
병원 근무라는 게 9시 출근 6시 퇴근을 엄격하게 지킬 수가 없는 처지라고 했다.
그래서 아침 8시 조금 넘으면 출근해서, 7시 넘어서 퇴근하는 일이 많다고 했다.
아직 다 처녀들인데 객지라서 각자 자취방에 가서 저녁을 해먹기가 싫으면,
셋이 함께 돌아다니다가 저녁을 교대로 산다든지 하여 해결한다고 했다.
내가 보훈지청에 근무하는 공무원이라고 하니까, 직장이 참 좋다면서
공무원들은 어지간히 바쁜 일 아니면 정시 출퇴근을 할 수 있다는 점,
그게 다른 직장인들이 부러워하는 점이라고 은근히 위로를 해준다.
나는 계속 듣고만 있을 수가 없어서 그녀의 말을 끊고,
장복희씨에 대하여 내가 관심을 갖게 된 계기와 까닭 등 나의 감정을 말했다.
민희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듣더니, 조용히 입가에 웃음을 띠면서 설명했다.
“그렇군요. 그면 요 며칠 사이 마음에 들게 되었다는 말씀인데, 그 정도로 감동 받을 사람이 잘 있겠습니까? 몇 년을 따라 다녀도 꿈쩍 않을 아가씨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리고 복희는 만나는 사람이 있답니다. 그러니까 박선생님께서 복희에게 그런 감정이 생긴 건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만, 걔에게 벌써 만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제가 말씀드렸으니까 앞으로는 이렇게 찾아오시면 안 되겠습니다. 그건 예의가 아니지 않습니까?”
“네, 잘 알겠습니다. 박간호사 선생님.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분들이 반드시 결혼을 약속한 사이라고 말할 수는 없잖습니까? 저는 이왕 나선 김에 장복희씨에게서 직접 한번 들어보고 싶습니다. 그 남자분을 결혼 상대자로 여기고 계시는지 말입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제가 더 이상 귀찮게 하지는 않겠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희창이에게 전화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맘에 드는 아가씨의 이름과 근무처와 친구들과 상황을 다 알아 냈는데 문제가 있다. 즉 사귀고 있는 남자가 있다는 점이다. 물론 본인에게 직접 물어 본 건 아니지만, 아주 친한 친구이자 직장 동료로부터 들은 이야기니, 사실일 것이다. 거의 일주일이나 따라 다니면서 용을 쓰고 있었는데, 이 무슨 재수 없는 이야긴가 말이다. 고3 때 잠깐 사귀다가 대학 드가자말자 양아치 같은 그 계집애에게 차인 그 기억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 생채기로 남아 있는데, 나의 두 번째 청춘사업이 시작도 하기 전에 이리 무참하게 깨져버리다니, 이 무슨 운명의 호작질이란 말인가? 나란 놈은 정말 재수 옴 붙은 놈이 아니고 무어란 말인가?’
희창이는 나의 자조 섞인 한탄에 일단 위로를 해 주었다. 욕도 섞어서…….
“야이 펴엉신아! 여자는 다 양아치야. 여자가 의리 있으면 남자 하지, 지랄한다고 여자 하냐? 짜식아, 그리고 여자가 배신만 땡기면 다 양아치 되냐? 버릴 만하니 버리는 것이지. 그런 여자들을 양아치라고 부르다니……. 임마! 여자는 다 의리가 없는 동물이야. 순국선열들처럼 여자가 의리 있어서 그 의리 쫓아간다고 생각해봐. 남편과 자식 어찌 다 건사하며, 어느 가정이 남아나겠냐? 요즘 들어 여자들이 이혼 자주 요구한다고 하지만, 그게 다 가정을 올바로 유지하기 위함이지. 자기 한 몸 편하자고 이혼하는 거 아니야! 이 세상 모든 가정이 지금처럼 제대로 꾸려져 나가는 데는 여자들이 의리를 헌신짝처럼 여겼기 때문이야. 친구 돈 빌릴 때 보증 서주는 것만 생각해봐도 그렇잖아? 여자들이 남자들처럼 계산 없이 마구 보증 서준다고 생각해봐. 남아날 가정이 있겠냐? 그리고 이 자식아! 너처럼 옹졸해 빠진 놈이 울 자격이 어디 있냐? 야이 거슥한 똥자루 같은 머시마야! 대시해 보지도 않고 절망부터 하는 게 너의 특기잖니? 연애에 있어서 가장 무시해야 될 일이 뭐냐? 상대방 주변 인물들의 말을 함부로 믿지 말라는 원칙이 제 일조다 이놈아! 시작이 반이라는데 시작도 하기 전에 주눅이 들었으니, 너 같은 놈은 평생 가도 여자 하나 얻어 걸릴 일이 아예 없을 것이다. 니가 코가 없냐? 눈이 없냐? 직장도 있겠다. 부모님도 다 계시겠다. 아무 것도 꿀릴 게 없는데 무슨 지랄 같은 걱정을 하고 자빠졌냐?”
나는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한 마디 대꾸를 했다.
“키가 너무 작잖여~!”
한참동안 저 쪽에서 아무 말이 없었다. 희창이는 충격을 좀 받은 모양이다. 친구들 누구도 내 앞에서 키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난장이’라는 말도 꺼내질 않는다. 내가 너무 아파하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아니, 나의 신경질을 견딜 재간이 없기 때문이다. 학교 다닐 때 그런 말을 농담으로라도 하게 되면, 난 정말 옹졸하고 치사하게 그 친구와는 어떤 편도 먹지 않았다. 축구 농구 배구 등등 어떤 경기에도 그런 녀석과는 한편을 먹지 않았던 것이다. 괜한 소리 한 마디 했다가 나를 한편으로 만들지 못하게 되었을 때, 다른 친구들로부터 받아야 하는 비난은 견디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나는 그만큼 여러 가지 구기에 각별한 소질이 있었던 셈이다.
“야! 왜 꼭 이런 순간에 키 이야기를 꺼내고 그러냐? 사실 네 키는 그렇게 작지 않아. 우리 친구들이 평균보다 좀 웃도니까 그런 것이지 넌 작은 키가 아니야. 농구 배구 좋아하는 친구놈들 사이에서 니가 좀 작긴 하지만, 그건 우리 친구들이 농구를 좋아하다 보니 키 큰 놈들이 모여서 그런 것이지, 니가 정말 작아서 작아 보이는 게 아니야. 마음 좀 풀어!”
사실 164도 아니다. 163.8이다. 그러나 항상 0.2를 불려서 말한다. 굽 높이 제법 있는 구두를 신고 다니기 때문에 평소에 크게 표가 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친구들끼리 모여서 모처럼 길거리 농구라도 하게 되면 나는 숲 속의 난장이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아니 백설공주와 함께 살던 일곱 난장이라면 귀엽기라도 하겠지만, 숲 속의 난장이는 벌레나 잡아먹으며 사는 괴물로 보이지 않겠는가 말이다.
“야, 입에 발린 위로 말씀은 사절이다. 이게 뭐 어제 오늘 일이냐? 대학 다닐 때도 늘 폭탄 신세였잖니?”
키 큰 사람 다리뼈, 그렇게 파는 거 있다면 성을 갈더라도 사다 끼우고 싶다. 병신 아니면서도 병신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건 견디기 어려운 고문이지. 단지 키가 좀 작다는 거, 그것이 이렇게 삶에 큰 영향을 미칠 줄이야. 나폴레옹은 키가 150이어서 배둘레나 키나 같았다고 한다. 그래도 유럽을 다 집어삼키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것도 200년 전 이야기다. 단적으로 말해 미수다가 없던 시절 이야기가 아닌가? 그 비벼머글 뷁이 그런 말을 해가지곤 키작은 사람들의 의기를 얼마나 무참히 꺾어 놓았는가? 신세한탄이 절로 나온다. 그러나 이래봤자 되는 일은 없다. 금각사의 그 안짱다리 카시와기의 늠름한 모습을 배우자. 그것만이 살 길이다.
“야! 이런 말 있지? ‘병신이어서 병신인 것이 아니고, 병신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병신인 것이다.’ 이런 말 들어본 적 없냐?”
“짜식아, 그 말이 더 아파! 고만 끊자.”
“야야야, 잠깐만. 한 마디만 더 들어봐.”
“귀찮어! 끊자.”
“야야, 한 마디만! 핀치(pinch)가 찬스(chance)라는 말도 있잖니? 그리고 단점이 장점이기도 한 거야. 너도 저번에 일을 잘못하여 상급기관에 불려 갔을 때 대답을 잘하여 오히려 능력을 더 인정받게 되었다는 이야기 니가 했잖냐? 배형진이 초원이가 되어 말아톤 하는 걸 보여주니 전국민이 감동 먹는거야. 비장애인이라면 뭐가 감동이겠니? 다시 좀 생각해봐.”
녀석은 나를 위로하는 방법을 연구해 놓은 것 같았다. 초원이 이야기 듣는 순간 내 마음이 많이 풀렸다. 그렇다. 희아는 세계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아니지만, 네 손가락으로 치니 감동적인 것이다. 그래, 그래! 키좀 작은 걸 가지고 내가 너무 주눅 들었었다. 마음을 고쳐 먹기로 했다. 다시 카시와기의 안짱다리를 생각했고, 자신감도 좀 차올랐다.
처음에는 자포자기한 주눅든 모습을 보여 주리라. 그리고 자신감 없는 모습을 보이며, 그녀의 동정심을 노크한 다음, 수건에 물이 젖어들 듯, 천천히 나아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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