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Re:걸음걸이 17 - 그늘을 찾아==>和解相(이 글로 저도 해방됩니다.)
화해상(和解相)
우선 ‘화’라는 말은 ‘서로 입장이 다르더라도
대의(大義)를 위해서는 화해할 수 있다.’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을 떠오르게 합니다.
이는 민주주의의 원칙이기도 하죠.
또한 ‘해’라는 말은 ‘풀다, 벗다, 깨닫다, 설명하다’ 등의 뜻을 가진 말입니다.
절에서도 화장실을 ‘해우소(解憂所)’라고 하여
‘근심 걱정을 푸는 곳’이라 이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화해상’이란 ‘많은 사람들의 뜻을 받들어
맺힌 것을 풀어 잘 소통하게 하는 모습’이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우선 이 작품은 네(혹은 다섯) 명의 인물들의 중심점이 이루는 모양이
마름모꼴에 가깝습니다.
그림에서 마름모꼴은 안정감 + 변화를 나타냅니다.
작품 내용도 이와 같아서,
앉아 있는 두세 분은 이미 그늘에 도착하여 느긋하게 앉아있고,
주인공 할매는 그늘로 막 들어서려 하고 있습니다.
오토바이 탄 아저씨는 고통을 피하여 멀리 달아나고 있죠.
사진의 시간적 배경이 여름이므로 햇볕은 고통입니다.
모든 인물이 이 고통을 피하여 그늘이라는 안식 속으로 다가듭니다.
주인공 할매의 걸음걸이로 보아 햇살은 상당히 뜨겁습니다.
그늘로 바삐 움직이고 계시죠.
그늘도 완벽한 그늘이 아닙니다. 앉은 할매의 등에 햇살 일부가 보입니다.
그러나 따가운 햇볕 속보다는 이분들이 앉은 곳이 서늘할 겁니다.
그래서 바삐 다가오지만, 그늘 자리가 넓지는 않아 보입니다.
그래도 새로 한 분이 들어서면 모두들 조금씩 자리를 양보하여,
새로 온 분도 그늘 속에 앉을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드실 겁니다.
버스가 올 때까지 다 같이 쉬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버스를 타고 가서 도착하면 완벽한 안식에 이르지만,
지금 버스를 기다리는 이 시점은 임시적으로 고통을 견디는 장소입니다.
그늘이 좁더라도 함께 쉬어야 합니다.
고통도 함께 견디면 견딜 수 있습니다.
독식(獨食)은 나쁩니다. 나누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분배를 포기하면 뚫린 곳도 막힙니다.
분배는 양보이고, 가진 자 쪽에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없는 자에게 양보를 요구하는 것은 착취입니다.
신문 읽는 사람이 전 인구의 1/10밖에 안 된다고 한자를 사용하면,
무식한 사람은 신문을 읽지 못하고, 또 더 읽지 않습니다.
유식한 자가 무식한 쪽에 맞추어 글을 써야지,
‘무식한 니들이 공부하여 유식하게 되어라.’ 해선 안 됩니다.
그러므로 이미 그늘에 앉아 있던 노인들도 새로 오는 노인에게
자리를 내어 주어야 하고, 심하면 자기가 나가 앉기도 해야 합니다.
햇볕 속에 있던 사람이 가장 힘들었을 테니까요.
기득권을 포기하는 것이 양보요, 미덕이요, 화해입니다.
시간적으로 이 작품 장면 바로 다음 장면이 화해의 장면이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현실에서는 이게 잘 지켜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화해의 기본을 모르는 것들이 어거지를 쓰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이끌어 가는 것들은 이 어거지에 휘둘립니다.
그런 것들이 이 그늘에 오지 못하도록
저 편으로 가고 있는 오토바이 뒤에 태워 보내버려야 할 것 같습니다.^^
참 갑갑하시죠?
그러나 너무 절망적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경제나 정치나 다 물처럼 흐르는 것이라서,
막히면 뚫고 지나갈 것입니다.
튀어나온 곳은 깎으며, 움푹한 곳은 메우며 물이 흐를 것입니다.
그늘로 다가서면 이미 앉아 있던 분들이 조금씩 양보할 줄 알기 때문에
우리 주인공 이 할매는 씩씩하게 그늘로 다가섭니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 장래는 밝을 것입니다.
우리 국민들이 아주 똑똑하시니까요.
그렇게 될 것을 저는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