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우리 그릇 `사발`
우리의 그릇"사발(砂鉢)"
신한균 기자 shindo7@naver.com
신한균 기자는 도예가 신정희의 장남입니다.
현재 경남 양산 통도사 부근에서 작도 활동과 <잃어버린 사발을 찾아서>란 책을 집필 중입니다. 도자기에 묻어 있는 일본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 '우리 옛그릇 이름 되찾기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일본학자가 왜곡한 우리 도자사를 바로잡을 뿐 아니라 미학자들이 왜곡한 도자기의 본질을 사기장인 제가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며 책을 쓰고 있습니다.
일본 국보사발은 왜 조선의 제기인가? (1편)
조선에서 빚어져 일본에서 국보와 보물이 된 사발을 보고, 한 일본인은“다른나라(조선)에서 ‘잡기’였던 물건을 일본인이 미를 찾아내 국보로까지 승화시킨 것은 우리 일본인들만이 가진 특유의 미의식이 있다'며 '그 미의식은 위대하다'고 말합니다.
한국인은 “우리 조상이 간단히 빚은‘막사발’마저 신주 모시 듯하는‘일본인’'을 보고 비아냥거립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은 자료부족과 정성부족 그리고 식민사관에 오염되어 우리의 옛사발 실체를 못보고 있고, 일본 또한 우리 사발에 대한 많은 연구를 했지만, 자기 조상이 만든 도자기가 아니라 진실을 밝히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한국의 사기장인 필자는 이 사발들은 여러 지면을 통해‘한민족의 제기’가 있다는 사실을 말해왔으나 항상 몇 페이지로 정해진 지면상의 이유로, 단순하고 추상적으로만 이야기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필자는 이번 기회에 민족정기 바로세우기 운동을 하고 있는 <오마이뉴스>를 통해 '일본 국보사발은 왜 조선의 제기인가'에 관한 이야기를 5회에 걸쳐 연재하고자 합니다.
조금은 지루하고 도자기 전문용어가 많습니다만, 친일사전을 발간하여 민족정기를 세우는 것이 중요하듯이 우리사발을 우리가 정확히 아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은 일본 노무라미술연구소의 요청으로 일본 학술지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필자주>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도자기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그 중 여기서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사발입니다. 필자가 이야기 할 사발은 본래 제기를 비롯해서 필세, 보시기 그리고 밥공기도 포괄적으로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한반도에서는 여러 가지 용도를 가진 그릇이었으나 일본으로 건너가 찻 사발로 사용된 것이 이 이야기의 중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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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국보와 보물, 그리고 대명물
그 중에서 일본 문화의 중심이 되고 일본인이 '이도자완(井戶茶碗)'이라 부르고 숭배의 대상이 되어 있는 사발들이 있습니다. 필자는 일본인이 '이도자완'이라 부르는 이 사발들을 진주 근교에서 빚었다하여 진주사발이라 부릅니다.
이 중 하나가 일본의 도자기 중 가장 먼저 국보로 지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국보가 된 과정이 재미있습니다. 이 사발을 국보로 지정할 때 일부 우익들이 조선 사발이라 반대했었다고 합니다.
(1)의 그림은 진주멧사발(일본 大井戶茶碗, 일본국보), 고봉암소장입니다.
(2)의 그림은 진주멧사발(일본 大井戶茶碗, 일본중요문화재), 개인소장입니다.
(3)의 그림은 진주멧사발(일본 大井戶茶碗, 일본중요문화재), 부산기념관 소장입니다.
(4)의 그림은 진주멧사발(일본 大井戶茶碗, 일본중요문화재), 세이까또미술관 소장입니다.
그림(1)이 일본의 국보가 된 이유로는 비록 조선에서는 가치가 별로 없는 잡기인 막 사발이었으나 일본 차인의 심미안에 의해 아름다움을 찾아내었고, 또한 밥공기였던 이 사발의 용도를 찻 사발로 승화시켜 이 사발 속에 내재 된 미를 세상에 알린 것은 일본이고 또한 사랑을 받은 곳도 일본이므로 그들의 국보가 될 자격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이 사발과 같은 '이도자완'이란 분류명을 가진 여러 사발들이 중요문화재(한국의 보물에 해당됨), 중요 미술품 그리고 대명물이 되어 현재 일본에서는 숭배의 대상이 될 정도가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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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덕사 고봉암에서 일본국보가 된 진주멧사발을 감상하는 필자 | |
ⓒ2004 신한균 |
이 사발들은 ‘지방가마’라 불리며 도자사(陶磁史)에서는 상대적으로 경시되어왔습니다. 현재도 도자기 학자뿐만 아니라 대다수가 이 사발을 ‘井戶자완’이란 일본 이름을 사용하고 우리나라에서는 분류명도 아닌‘막사발’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앞에서 필자는 이 사발들을 진주사발이라 부른다고 언급했습니다.
몇 년 전부터 단지 굽이 좁고 높아서 제기일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만 있을 뿐 정확히 조선의 제기라는 근거를 어느 누구도 제시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이 사발의 용도를 확실히 밝히지 못하자 일본에서는 일부의 의견이기는 하지만 본래 이 사발은 일본인이 디자인(design)하여 밀무역에 의해 조선에서 수입한 주문품이라는 억지 주장도 있습니다.
진주사발은 과연 잡기인 막 사발이었을까요? 막 사발이란 이름을 통해 일본인들은 우리 조상의 잡기 마저 숭배한다는 우월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조상이 빚은 사발은 우리가 정확히 그 그릇의 쓰임새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기본적인 생각입니다.
필자는 여러 가지의 근거를 들어 일본에서 명물이 된 진주사발의 대부분이 우리 한민족의 제기였음을 밝히고자 합니다. 물론 진주사발 중 소수이지만 밥 사발이 명물이 되어 있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에서 명물로 되어 있는 진주사발이 대부분 제기였음을 설명하기 위해 먼저 우리민족의 제기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1) 우리 한민족의 제사를 향한 마음가짐을 소개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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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사 풍속도 | |
“제기는 특별한 곳에 보관하며 항상 자물쇠를 채워 봉하며 다른 일에 쓰지 않으며 창고가 없을 때는 특별히 함을 만들어 보관해야 된다. 대장부는 제기를 빌려쓰지 않으며 제기를 미처 마련하지 못할지라도 보통 그릇과 같이 값 싼 것으로 대용하지 않는다.”(왕제)
곡례(曲禮)라는 책에는 “군자라면 아무리 가난 할 지라도 제기는 팔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여기에는 “제기가 생명을 다하면 특별히 묻어서 처리한다” 라고 나와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 조상은 제기를 얼마나 중요시 여겼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제기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제물이나 제수를 담는 것을 비롯해 술을 따르는 잔, 반찬을 담는 보시기, 밥을 올리는 멧그릇, 갱그릇이라 하여 탕을 담아 올리는 제기 등에 그 다양성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가 대부분의 제기는 굽을 높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조상이나 모시는 신을 높이 받든다는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 입니다.
(2) 한반도 제기의 특성
우리 한반도의 제기는 여러 가지 면에서 아주 특별한 디자인이었습니다.
제기의 변천사를 간단히 설명해 보면
ㄱ) 한반도의 제기는 처음에는 청동기를 흉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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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동기나 유기를 흉내낸 임진왜란 전의 도자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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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같이 한반도의 제기는 형태뿐만 아니라 문양 역시 청동기를 그대로 모방하였습니다.
그림(1)은 중국의 오래 된 청동기 제기입니다. 그림(2)는 고려 청자로 된 제기입니다. 고려시대에도 중국의 청동기를 그대로 닮으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입니다.
그림(3)은 15세기 관요에서 만든 왕을 위한 백자제기 입니다. 그림(4)와 상당히 닮은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백자제기는, 원래는 그림(4)과 같이 위로 뻗은 막대문양이 있었으나 깨어져 흔적만 남아 있습니다. 그림(1),(2),(3)은 임진왜란전의 제기입니다. 그림(4)는 조선 초기에서 조선 후기까지 유기로 제작 된 제기입니다. 결론적으로, 한반도의 제기는 청동기나 유기를 모방했었습니다.
ㄴ. 제기는 문양이나 특별한 장식이 없을 경우에는 굽이 아주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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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본문참조 |
그림(1),(2)는 한반도 도기(토기)로서 제기입니다. 굽을 높게 만들어 조상을 높게 받들었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림(3)은 조선의 민가용 제기라고 추정됩니다. 분청사기입니다. 그림(4)는 현재 일본에서 찻사발로 더 유명한 지방가마의 제기로 추측됩니다. 이것과 비슷한 목기로 된 제기도 있습니다. 그림(1),(2),(3),(4)는 임진왜란 전의 제기입니다. 특히 (3),(4)는 지방가마에서 빚은
▲ 제기는 문양이나 특별한 장식이 없을 경우에 굽이 아주 높다
민가용 제기입니다.
또한 제기 고유의 난해한 형태와 문양이 단순화되어 아주 소박하고 정겹습니다. 그리고 제기의 형태에서 지방의 토속미가 강하게 배어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림(5),(6)은 임진왜란 후의 제기입니다. 임진왜란 후 전국 토에서는 백자만 정착하게 됩니다.
그림(5)는 궁중에서 제를 올릴 때 쓰던 잔입니다. 아주 굽을 높게 만들었습니다. 그림(6)은 조선 도자명고라는 책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이 그림을 통해서도 제기는 굽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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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소반 - 조선도자명고, 학고제 | |
ⓒ2004 아사까와 다꾸미 |
조선에서는 제기로 쓰는 그릇은 도자기뿐만 아니라 철기, 목기도 굽이 좁고 높은 것이 대부분이며 굽이 높은 이유는 조상을 높이 섬긴다는 뜻입니다. 위의 그림을 보아도 제기는 일반 그릇과는 특별히 다른 디자인이었으며 일반적으로 굽부분이 높거나 특별한 처리를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민족의 제기는 굽이 높다는 것입니다.
ㄷ. 굽이 높지 않으나 굽에 홈을 판 것도 있다
그림(1)은 임진왜란 전에 일본으로 건너 간 조선의 제기입니다. 현재 일본에서 대명물 찻사발이 되어 있습니다. 일본에서 찻 사발로 쓰기 위해 전부분의 귀를 고의로 떼어 냈다 합니다. 그림(2)는 임진왜란 중에 왜군이 노획하여 전리품으로서 도요토미히데요시에게 상납된 조선의 제기입니다. 이것도 일본인이 찻 사발로 쓰기 위해 옆부분의 귀를 떼어 냈습니다. 그림(3)은 진주부근의 제기 보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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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굽이 높지 않으나 굽에 홈을 판 것도 있다. |
ⓒ2004 본문참조 |
굽 부분에 홈만 나있지 귀를 붙인 흔적은 없습니다. 일본에서는‘청이도(靑井戶)’라 부릅니다. 일본 네즈미술관에 있습니다. 그림(4)는 동경박물관에 있습니다. 옆면의 붙인 귀 장식의 디자인이 특이합니다.
일본에서는 그림(1),(2)의 사진과 같은 종류를 ‘와리고다이(割高台)자완’이라 부릅니다. 필자는 이것을 ‘나눔굽사발’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림(5)는 아티카컬렉션에 있는 17세기 한민족의한반도 제기입니다.
또한 일본에서는 위의 그림 속의 제기를 모방한 찻 사발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림 (1),(2),(3)와 같이 굽에 홈을 파거나, 그림(4),(5)처럼 옆면에 귀 장식을 단 제기는 사실 민가에서 쓰는 제기가 아니었습니다. 지방에서 유학자들이 공자에게 제를 올리는 향교에서만 사용하였습니다. 그림(3)은 굽 부분에만 홈이 파여 있습니다. 이것은 진주사발을 빚었던 옛 가마터에서는 향교용 제기, 민가용 제기, 일반 식기 등 여러 가지를 함께 빚었음을 뜻합니다.
지방의 민가용 제기는 향교보다도 더 단순하고 소박한 것이 되었습니다. 위의 그림을 통해서도 한민족의 제기는 미학적 파격을 통해 개성미가 강한 것이었음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위의 사진 속에 있는 그릇들은 제기였기 때문에 망자의 옛 무덤 속에서 출토되지 않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 한 바와 같이“제기가 생명을 다하면 제기만 따로 묻어야 한다”라는 옛 기록이 있습니다. 혹, 출토되었다면 이는 제기만을 따로 묻었을 경우입니다. 결론적으로 제기는 일반무덤에서 출토되지 않습니다.
ㄹ. 면 치기를 한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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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치기를 한 조선의 제기 |
ⓒ2004 본문참조 |
제기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가 면 치기입니다. 면 치기란 표면을 칼로 깎아낸 것을 말합니다. 임진왜란 후에도 제기의 디자인은 일반그릇과는 사뭇 차별화 되고 독특한 것이었습니다.
ㅁ. 물레선을 남겨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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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동기의 난해한 요철문양을 물레선으로 단순화 시킨 경우 | |
ⓒ2004 본문참조 |
물레선을 일부러 낸 것도 있습니다. 이것은 청동기의 난해한 문양을 과감하게 생략하여 단순화시킨 조선사기장의 창조적 정신의 발로로 보여 집니다.
그림(1)은 덤벙분청 제기(16c) 입니다. 후쿠오까시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그림(2)는 국립박물관에 소장(17c) 되어 있습니다. 그림(3)은 미국 보스턴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금속제기 입니다. 그림(4)는 난해한 문양을 가진 청동으로 된 제기 입니다.
조선은 초기부터 그림(3),(4)처럼 청동기나 금속기에 나타나는 요철문이나 도식화 된 문양을 그림 (1),(2)처럼 단순화 시켜서 점점 우리민족 고유의 제기로 변형시켜서 토착화 시켰습니다. 또한 그림(1)은 임진왜란 전이고, 그림(2)는 임진왜란 후의 것입니다.
위의 그림에 나타나 있는 물레 선은 조선의 도자기로 된 제기가 금속제기와 달리 독특한 개성을 가진 한반도의 제기로 토착화되어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결론은 민가용 도자기로 된 제기는 금속기의 요철문이나 도식화 된 문양을 과감히 생략 단순화시켜 사용하였습니다.
ㅂ. “제(祭)”를 써 넣은 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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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祭'를 써넣은 제기 | |
임진왜란이 지나고 나서는 제기 차체에 “제(祭)”자를 각인하여 누구든지 제기임을 한눈에 알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위의 그림은 모두 임진왜란 후의 제기입니다. 이 또한 제기임을 확실하게 밝혀 일반 그릇과는 혼돈이 되지않도록 배려한 조선 사기장들의 섬세함을 알수있게 합니다.
이제 '막사발'이 아닌 '우리사발'이다 | |||||||||||||||||||||||||||||||||||||||||||||||||||||||
필자는 한국의 사기장(일본=도공)으로서 우리 도자기에 묻어있는 일본 식민지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 '우리 옛그릇 이름 찾아주기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일본 학자가 왜곡한 우리 도자기의 역사적 진실을 바로잡고 또 식민사관과 왜독에 중독된 우리 사발의 본질을 바로잡기 위해 우리 사발을 직접 빚으면서 한국 사기장 눈으로 본 우리 사발의 진실을 책으로 쓰고 있는 중입니다.
'이조'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조선의 책에는 어디에도 없는 말입니다. 이 말은 일본왕의 영지인 한반도를 이씨가 잠시 다스렸다는 뜻입니다. 광복 후 '이조'는 '조선'으로 바뀌는데 그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아직도 우리 나라 일부 사람들이 '이조'란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작금 우리의 옛 지방 사발을 '막사발'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 민족에게 사발은 무언가를 담는 용도를 가진 도자기의 총체적 명칭입니다. 제기, 필세, 보시기, 바리기, 입기, 발탕기, 밥공기 등을 표현한 말입니다. 막사발이란 용어는 사전에도 없는 말입니다.
임진왜란 전 조선시대 진주 지방의 민가에서 제기용으로 사용하던 사발 하나가 현재 일본의 국보입니다. 일제 식민지 시절 바로 이 사발을 보고 일본의 대표적 미학자인 야나기 무네요시가 '잡기론'을 주장했습니다. 이 말을 한국식으로 부른 말이 막사발입니다.
잡기론의 모델이 된 이 사발은 일본에서 '기자이몽이도'라고 부릅니다만 필자는 진주 멧사발이라 부릅니다.
일본 사람들은 이 사발 뿐만 아니라 일본에 있는 우리 옛 지방 사발의 아름다움을 논할 때 '와비사비'란 말을 씁니다. 직역하면 '고독과 외로움'이란 뜻을 지닌 합성어 입니다.
이 와비사비의 뜻을 우리말로 표현하면 '하나뿐이라 외롭고, 그 외로움이 진해져 고독이 되고, 그 고독이 너무 아름답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을 제가 다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젊은 청춘남녀가 사랑할 때 아주 이쁘게 보입니다. 그러나 노부부가 석양빛 아래서 다정하게 걷는 모습 또한 아름답습니다. 젊은 청춘남녀가 청자나 백자 사발이라면 우리의 옛 지방 사발들은 노부부의 다정한 미소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일본인들이 와비사비라는 아름다움을 자기네만의 고유한 미의식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이렇습니다.
우리 일본인들은 사물을 바로 보는 직관이 있기에 조선에서는 '잡기'라 누구도 거들떠 보지 않던 잡기사발에서 와비사비의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그리고 가장 고귀한 차사발로 승화시켰다. 고로 이 고려 다완(우리 옛 지방 사발)의 미는 바로 발견한 당사자인 일본의 미의식 인 것이다. 그럼으로 우리 일본에 있는 고려 다완은 비록 조선인이 만들었으나 전부 우리 일본의 미학 속에서 재탄생했으며 일본에서 탄생했기에 우리의 국보나 보물이 된 것이다. 고려 다완이 한국의 미학이 될 수 없는 증거로는 한국인들은 이것들을 막사발이라 부르면서 잡기로 인정하고 있고 이 사발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차를 마시지 않고 커피만 마시는 것이 한 예다.
일본의 대표적 사학자 야나기 무네요시의 글을 그대로 소개해 봅니다.
아주 평범한 물건이다. 이것은 조선의 밥사발이다. 그것도 가난뱅이가 예사로 사용하는 밥사발이다. 아주 볼품없는 물건이다. 전형적인 잡기다. 가장 값싼 보통의 물건이다. 만든 자는 비천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개성 따위는 아무런 자랑거리가 될 수 없다. 누구나 만들 수 있는 것,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것, 누구나 살 수 있는 것, 그것이 이 찻사발이 가지고 있는 그대로의 성질이다. 이것은 평범함의 극치인 것이다.
흙은 뒷산에서 파왔고, 유약은 화로에서 꺼낸 재이고, 물레는 심이 느슨해져 있다. 모양을 보살필 필요가 없다. 많이 만들어 온 물건이다. 일은 빨랐던 것이다. 빚음은 거칠다. 손은 젖어 있는 그대로다. 유약은 흘러서 굽에 드리웠던 것이다. 방은 어두웠던 것이다.
도공은 문맹인 것이다. 가마는 너무도 초라하다. 굽는 방법이 거칠다. 들러 붙은 것도 있다. 값싼 것이다. 누구도 거기에 꿈 따위는 꾸지 않는다. 이러한 일을 해서 먹고 사는 것을 그만두고 싶은 지경이다.
도자기는 비천한 사람이 하는 일로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대부분 소비물이다. 부엌에서 사용된 것이다. 상대는 농사꾼이다. 담는 것은 하얀 쌀이 아니다. 사용된 후에 제대로 씻지도 않는다. 조선의 시골을 여행하면 누구나 이 더러운 광경을 볼 수 있다. 이 정도로 흔해 빠진 물건은 없다. 이것이 틀림없는 천하의 명기 대명물의 정체다. 이하 생략…
결론은 이렇습니다.
"그 더러운 조선의 잡기에서 미를 발견하여 천하의 명물로 승화시킨 우리 일본인들의 심미안은 위대하다"
이 글을 보고 필자는 말합니다.
우리의 옛 사기장들은 사회적 신분의 차별이라는 아픔과 슬픔 속에서도 하늘이 내린 사기쟁이라는 천직을 숙명이라고 여기면서 창작의 기쁨을 위해 오직 물레만이 삶의 전부인줄 알고 살아왔습니다. 가슴에는 자유혼을 가지고 본능적 창조정신을 발휘하여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자기를 만들었습니다.
사발의 쓰임새를 의식한 소박미와 기능, 단순성을 표현하기 위해 흙의 선택에서 불때기까지 치밀하게 계산된 창조 행위임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우리의 명품 옛사발을 우연히 만들었다는 뜻으로 '무위가 나은 파생물'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이 말은 조선인의 예술혼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위'라는 말은 우연히 만든 명품의 가치를 발견한 자기들의 심미안을 강조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나 도자기 기술자인 필자는 정확히 말합니다.
"무위처럼 보이나 무위가 아닌 인위를 통해 무위적 아름다움 즉 자연미를 그대로 표현한 창조적 쟁이정신의 결과입니다."
필자는 야나기무네요시가 도자기의 기술적인 면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고 느꼈습니다. 아무리 일본인이라 할지라도 도자기 기술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이런 글을 절대 쓰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은 대부분 몰라서인지 야나기무네요시의 잡기론에 동조하듯이 우리의 옛 지방사발을 막사발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한국에서 옛 지방 사발에 대해 체계적으로 연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 나라는 예부터 좋은 도자기를 많이 생산했고 우리 조상이 마구 쓰던 사발들을 국보와 보물로 숭배하는 일본인들을 보고 우등 의식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옛날에는 도자기 뿐만 아니라 모든 공예품도 팔기 위한 것이 아니라 쓰기 위해 만들었습니다. 또 일본과 달리 만드는 자(장인)의 만드는 즐거움을 인정하고 제약을 가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아사카와 다쿠미라는 일본 사람이 지은 책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만드는 즐거움 속에서 빚은 우리의 옛 지방사발은 당연히 팔기위해 억지로 꾸민 아름다움보다 건강하고 순수한 자연미가 절로 표현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 일본 사람들은 야나기 무네요시의 잡기론에 왜 동조할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조선에서 조상을 위해 사기장이 정성껏 빚은 제기사발의 한국적 미학과 조선 사기장의 우수성을 인정한다면 그들의 식민지이던 조선을 우러러 받드는 일본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일본에서도 우리의 옛 지방사발을 빚은 조선사기장의 솜씨를 신의 경지라고 표현하며 조선의 도공의 품에 안기는 것이 소원이라는 일본 도예가도 많습니다.
그러면 일본인이 우리 옛 지방사발의 어떤 점을 좋아했을까요? 바로 중국에도 일본에도 없는 개성 있는 자연미 때문입니다.
대목(목수의 장) 이야기를 들어보면 휘어진 나무를 대들보로 사용하면 일이 더 많다고 합니다. 비록 일거리가 많아진다고 할지라도 자연미를 표현하기 위해 휘어진 나무를 사용하는 대목의 정신은 '쟁이정신'그 자체입니다.
이 건축기술을 흉내내 일본에서 탄생한 것 바로 그것이 일본 국보 차실인 '묘희암'입니다. 이것은 일본의 건축학자가 규명한 사실입니다. 과연 옛 우리 나라 대목들이 바보라서 삐뚤어진 나무를 대들보로 사용했을까요? 그것은 개성 있는 자연미의 표현이었습니다.
이것 뿐만이 아닙니다. 모든 예술의 너그러움과 해학 그리고 개성 있는 자연미는 우리 한민족의 심성이었습니다. 모든 공예품에 이런 심성이 배여 있었습니다.
이런 여유 있는 심성이 일본인에게 없었기에 만드는 물건에 개성적인 자연미를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옛 지방사발을 보고 너무나 감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감탄한 심정을 표현한 말이 와비사비라는 일본말입니다.
이것을 우리 말로 표현하면 개성적 자연미가 아닐까요? 그리고 우리 한반도에서는 개성적 자연미를 추구하는 심성이 생활 속에 배여 있었기에 일본인들처럼 미학이니 철학이니 떠들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런 억지 논리로 일본은 우리의 옛 지방 사발을 그들만의 미학이라 표현하면서 아주 엄청난 가격으로 우리의 옛 지방 사발들을 팔고 샀습니다.
일본이 우리의 옛 지방 사발을 아주 비싼 값으로 거래한 것은 임진왜란 20년 전부터 입니다. 이 무렵 조선과 일본은 부산포를 통해 무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우리 사발을 아주 비싸게 판 사람이 일본의 정신적 영웅이자 다도의 확립자인 센노리큐입니다. 또 우리 사발을 아주 비싸게 구입한 사람들은 그 당시 최고의 권력자였습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도 그 중 한 사람입니다.
만약 일본 그네들이 말하는 잡기였다면 그 흔한 것을 그토록 비싼 값에 그것도 최고 권력자에게 팔 수 있었을까요? 일본인들이 말하는 그렇게 흔한 잡기였다면 지금 한국에 옛 지방 사발들이 많이 남아있어야 합니다. 어느 사람은 말합니다. 왜정 때 일본인이 다가져갔다고.
아닙니다. 일본인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일제시대에 그토록 찾아도 그들의 국보인 진주 멧사발 같은 명품은 하나도 못찾았다고 합니다.
일본인들은 우리 옛 사기장들이 조상을 제사를 위해 빚은 사발들을 신의 그릇이라 숭배하면서도 그것을 만든 사기장들의 후손인 우리의 한국사람들을 왜 우러러보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일본에 건너간 우리의 옛 지방 사발들은 여러 종류가 있었습니다. 밥공기도 있었고, 보시기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조선의 밥공기가 찻사발이 된 것도 많습니다. 그러나 국보와 보물이 된 것은 조선의 제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또 임진왜란 후 일본인들의 간청으로 주문을 받아 일본으로 보낸 것도 많이 있습니다.
현재도 일본 재벌들이나 돈 많은 사람들은 우리 옛지방 사발을 한 점도 소장하지 못했다면 재벌소리와 부자소리를 듣지 못할 정도입니다.
마지막으로 일본 사람은 독도를 '죽도' 즉, 다케시마라 부릅니다. 그러나 보통 일본인들은 이 말을 모릅니다. 우리 나라는 꼬마도 독도라는 섬을 다 압니다.
그리고 우리의 옛 지방 사발의 아름다움을 일본인들만 느낄 수 있나요?
그렇지 않다면 지금부터라도 막사발이란 이름을 우리 사발로 불러 주세요. 도공을 사기장으로 불러주세요. 이조라는 말을 조선으로 불러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