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하동 새미골 가마
-지상에 다시없는 얘술의 극치 이도다완
일본 다도(茶道)의 신령스런 그릇 이도다완을 들먹이면 우리는 임진왜란(1592~1598) 7년을 생각한다. 임진왜란을 생각하면 우리는 또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이도다완의 고향 경남 하동군 진교(辰橋)를 머리에 떠올린다.
수많은 도자기와 도공들이 일본으로 끌려갔던 물목, 노량해협에서 우리는 충무공을 잃었고 임진왜란이 끝난 1598년부터 이도의 고향 진교는 과연 이곳에서 도자기가 구워졌는지조차 모르게 철저히 역사의 장에서 사라져 버렸다.
‘신비의 다완’ ‘환상의 다완’ ‘자연을 창조하기 이전의 자연스러운 맛’이락 찬미하며 일본 다도문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이도다완은 소위 그들이 공공연히 얘기하는 ‘도자기 전쟁’이었던 임진란 7년 동안 조선에서 탈취해 간 도자기 기술에 의해서 탄생한 것이다.
우수한 도공과 도자기 기술을 탈취한 덕으로 그들의 다도문화는 세계적인 수준으로 성장한 반면 진교의 도자기는 그 생명마저 끊어지고 말았다.
“지상에서 다시없는 예술의 극치”라면서 야나기 소외노 같은 이는 “이도다완이 일본으로 건너오지 않았으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일본의 것이다”란 말을 서슴지 않고 있다. 한술 더 떠서 “일본인의 심미안만이 발견할 수 있는 예술의 극치다. 그러므로 이것은 일본이 창조한 것이다.” 멋진 표현임에 틀림없으나 만든 쪽에서는 유구무언(有口無言)일 뿐이다.
-15세기 다도문화의 극치를 이룬 진교
진교의 사기촌(沙器村) 새미골(井戶鄕) 요(窯)는 4백년이란 긴 세월동안 도자기와 차를 잃어버린 남해안 바닷가의 한적한 갯마을이었을 뿐이다.
역사의 장에서 밀려난 진교는 사실상 임진왜란이 있기 전까지는 기후나 지리적인 여건으로 보아 우리나라 다도문화가 꽃폈던 곳이다.
진교를 중심으로 그 서북쪽은 신라 흥덕왕 때(828) 당나라에 다녀온 대렴이 차씨를 가져와 왕명으로 심게 했전 차밭이 있는 지리산. 지리산 준령이 남으로 내려뻗은 시원지에 진교는 자리하고 있다. 2억5천만 년이라는 긴 세월의 나이를 먹어 화강암의 풍화작용으로 다완의 태토(胎土)로는 제일로 치는 철분이 듬뿍 섞인 백토(白土)가 무진장 있다.
차나무 자라기에 안성맞춤인 기후와 토질에서 차기(茶器)를 굽는데 둘도 없는 흙이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곳이다.
동쪽 8킬로 떨어진 곳에는 신라 때부터 차절(茶寺)로 이름을 날리던 다솔사가 있고 서쪽 또한 차의 고장이자 차절이 많은 차승(茶僧)을 배출한 순천 송광사가 있는 땅이다. 남쪽 또한 코앞에 있는 노량해협을 건너면 지금도 다정리, 다천 등 차의 옛 지명이 그대로 남아 있는 남해군(南海郡)이 앞을 막고 있다.
현재 진교면 버스정류장이 있는 시장은 일제시대 간척사업으로 매립되기 전에는 진제포(辰梯浦)라는 도자기 무역항이었다.
진교에서 나오는 도자기가 진제포 선창에서 배에 실려 대마도로 또 큐수 등 일본 각지로 떠났고 임진왜란이 끝나 왜군이 철수할 때 안(安) · 정(鄭) · 이(李) · 하(河)씨 등 22개 성씨를 가진 80여 명의 도공이 진제포를 통해 강제로 끌려갔다. 한치의 틈도 없이 주위를 빙 둘러싸고 있는 차의 고장이 이곳이다.
임란이 일어나자 진주와 사천 노량해협은 조선군과 일본군의 최대 격전지였다. 일본군이야 마땅히 총력을 집중해야 했고 이 전투에는 시마스 요시히로, 구로다, 고니시 같은 명장들이 참전했다.
이중 구로다는 일본에서 손꼽히는 당대의 차인으로 선철학(禪哲學)과 불교와 차의 세계에 깊이 몰입한, 조선다완의 수집광이었다. 진주전투에서 성공을 한 이후 가는 곳마다 도요지를 습격해 조선의 다기를 일본으로 가져 간 장본인이다.
교토 대덕사의 구로다묘역에는 몇 개의 이도다완이 일본의 보물로 본존돼 있다. 구로다의 침공경로와 주둔위치를 보아도 진교의 새미골이 이도의 고향이라는 것을 뒷받침해 준다.
또 사천성에 주둔한 시마스 요시히로는 1598년 최후 철수 때 이곳의 도공 80명을 붙들어 간 기록을 남겼다. 납치해 간 도공은 가고시마의 나와시로가와와 구시기노 일대에 수용, 그곳에 요를 만들어 도자기를 생산케 했다. 1930년 일제 때 경남 도지사를 역임한 일본인 도시는 임진왜란 때 요시히로가 연행해 온 도공 하씨(河氏)의 후손이라고 스스로가 밝히고 있다.
-파편까지 쓸어 간 일본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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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교토 대덕사에 보존되어 있는 이도다완을 두고 오래전부터 일인들은 그 발생지를 경남 김해나 진주일 것이란 추정을 해왔다. 일본에 현존하는 고려차완의 명칭이 대부분 생산지나 수출항의 지명이 붙어 있다. 때문에 이도는 정(井)자와 호(戶)자만 붙어 있는 지명이면 모두가 한 번씩 이곳이 고향이라고들 해 왔다. 1972년 진교의 도자기 파편이 있는 곳을 답사한 야시모도씨가 쓴 『조선의 도자와 고도요지답사기』란 책에는 “이곳 진교 도요지는 4세기~6세기~16세기로 추정된다. 파편의 특징은 도자기 마디가 높고 외부와 내부 허리 부분은 매화 열매 껍질 색깔로 퍽 아름다웠으며 형태는 꼭 이도다완을 닮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책이 나온 이후 이곳을 찾는 일본사람들이 수십명씩 떼를 지어 이 파편을 가마니나 배낭에 넣어 마구 가져 갔다. 처음에는 예사로 취급했으나 계속 가마니로 반출되자 마을 주민들의 신고로 출입이 제한됐다. 급기야는 ‘경상남도 기념물 24호’로 지정, 보호하게 됐다. - 차문화유적답사기 중에서 저자 “김 대성”- |
임진왜란, 정유재란. 오늘날 일본인들은 이 전쟁을 '야키모노 센소(陶磁器 戰爭)' 라고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만큼 이 전쟁은 조선과 일본 도자기 문화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7년 전쟁 동안 왜장들은 적게는 수백명 많게는 수천명에 이르는 도공을 납치해갔다. 그 결과 일본의 도자기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에 올라 있다.
16세기말, 자기(磁器)를 생산하는 기술을 가진 나라는 전 세계에서 조선과 명(明) 나라뿐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까지도, 조선 무역 독점권을 가진 쓰시마 도(對馬島) 도주(島主) 소오 요시도시(宗義智)는 조선 도자기 수입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이는 당시 다이묘(大名, 막부 체제 아래서 번을 다스리는 영주)들이 전장에서도 다회(茶會)를 열 정도로 다도에 심취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런 만큼 다도정신이 결집된 차그릇에의 집착은 지위에 비례할 만큼 강했다. 다회 자리에는 응당 호랑이 가죽이 깔리고 중국의 청자잔이 최고 자리에 올랐다.
다도의 사치는 세월이 흐를수록 심해져 도요토미는 황금의 다실(茶室)을 만들고 서양 선교사들을 불러 다회를 열 정도로 화려함은 극에 달했다.
그러나 귀족취향의 다도에 반발한 차의 대가들 사이에서는 서민의 차, 검소의 차, 즉 '와비 차'가 서서히 고개들기 시작한다.
일본 다도의 중흥조로 불리는 다케노조오(武野紹鷗)에서 모양새를 갖추기 시작한 와비 차는 도요토미의 차선생을 한 센리큐(千利休)에 와서 완성을 이룬다. 와비 차가 널리 퍼져 나감에 따라 중국의 화려한 찻잔보다는 꾸미지 않은 서민의 그릇, 소박한 일용잡기가 차그릇으로 각광을 받게 된다. 그 정신에 부합한 차그릇들이, 흙부뚜막에 마구 굴려도 조심스럽지 않은, 바로 그런 조선의 그릇들이었다.
조선의 대표적 그릇 중 하나, 키자에몽 이도(喜左衛門 井戶)가 있다. 지금은 일본 1급 국보로 교토 다이토쿠지사(大德寺) 코호이안(孤蓬庵)이란 절에 보관되어 있는데 임진왜란 이전에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반인의 눈으로 보면 마치 '개밥 그릇 같이 생겨' 전혀 볼 품 없는 이 그릇이 이미 당시에 황금 3천근 값인 550만냥에 팔렸다고 전해진다. 뿐만 아니라 지지리 못 생긴 이 그릇은 나중에 성(城) 한 채와 맞바꾸어지기까지 했다니….
무작위, 무기교의 질박한 멋에서 풍기는 당당함이 매력인 막사발은 가난한 서민들이 사용하였기에 지극히 평범하고 흔했다. 이름 그대로 막 사용할 물건이었기에 특별한 기교나 꾸밈없이 대범하게 만들어진 이 사발에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스러움이 여과없이 반영되고 있다. 평범함속에 묻어나는 고귀한 아름다움, 이것이 다인들이 발견한 막사발의 美的 세계이다.
이도다완의 특이한 색깔인 비파색(枇杷色)의 비결도 결국 이곳 흙 때문이었다. 산화된 철분과 모래흙이 많이 섞인 거친 흙과 바닷가의 규사(硅砂)와 조개껍질을 사용한 투명한 유약 때문으로 밝혀졌다.
특히 이도다완의 극치인 매화껍질의 표현은 조개껍질로 만든 천연 석회석을 사용함으로써 재현된다는 결론을 얻었다.
만들어진 연대도 15세기말~16세기로 국내 일부 학계에서 17~18세기로 추정한 연대보다 일찍이다. 결국 이도다완은 조선 전기 고려말로 거슬러 올라가 이 다완이 고려청자에서 조선백자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가다떼(堅手; 초기의 백자)시대로 변해가는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결론지어 졌다.
- 막사발의 역사
1) 막사발의 형태는 대범하고 굽을 중심으로 위쪽으로 갈수록 사발모양으로 완만하게 넓어지는 것이 특징이다.
표면은 일본인들이 비파색(枇杷色) 이라고 표현하는데, 이것은 황색을 띤 바탕에 붉은 기운이 돌고 여기 또 푸른 기운이 가미된 복잡한 색조합이다. 이 색조합에 유약의 균열이 있어 깊은 맛을 자아낸다.
2) 사발의 몸체에서 보이는 자연스러운 손자국. 물레질로 인해 생기는 손자국은 숙련되고 노련한 솜씨가 만들어낸 예술의 극치이다. 또한 잔의 허리부터 굽 사이에 보이는 휘둘림에는 다른 도자기에서는 볼 수 없는 예리함이 느껴진다.
3) 한편 굽에서도 대나무를 연상시키는 마디가 있어 이것을 중요한 감상 포인트로 하고 있다.
4) 그리고 간과할 수 없는 것이 굽 안쪽 중앙에 돌출한 부분이다. 이 부분을 두건(頭巾)이라 하는데 소용돌이 모양 등 막사발마다 모두 개성이 있어 흥미롭다.
5) 또한 중요한 감상대상으로 매화피(梅花皮)가 있다. 유약이 응결되어 나타난 형태로, 오늘날에는 숙련된 도공들에 의해 비교적 용이하게 재현되고 있으나 조선 막사발의 자연미에는 미치지 못한다.
6) 하(下)편 잔 안쪽에서 보이는 눈(目〕은 막사발을 포개서 구울 때에 유약이 용착(溶着) 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놓은 것이다. 이것도 조선 막사발의 중요 감상부분이 되고 있다. 단 대정호(大井戶)에는 눈이 있은 경우가 적어서 맨 위에서 구워졋거나 하나씩 구웠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 도자기 제작과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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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게 간 흙을 물에 담가두었다가 더러운 물질이 생기면 걸러서 버린후, 아래에 가라앉은 깨끗한 흙을 그늘에 잘 말려 질좋은 찰흙을 만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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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섞어서 흙이 부드럽게 될때까지 손이나 발로 반죽을 해줍니다. 반죽이 알맞게 되었다면 접시, 꽃병, 찻잔 등.. 원하는 모양으로 만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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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양이 다 되었다면 음각, 압인, 화장토, 상감, 역상감 등의 기법을 이용하여 무늬를 새겨 넣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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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늬까지 완성된 자기는 그림을 그리거나 유약을 입히기 쉽도록 하기위해 가마에 넣어 처음굽기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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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구워진 자기에 그림을 그려넣으면 더 멋진 자기가 되겠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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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중·고화도 유약, 투명유·유탁유·무광택유·결정유·구열유, 재유약·소금유약 등을 분무법, 담금법, 뿌림법을 이용하여 유약을 입힙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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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약을 입힌 도자기는 마지막 굽기인 재벌구이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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